서울에는 눈이 온다는데 이곳 대구에는 바람이 몹시도 불어옵니다. 문득 현진건의 빈처를 닮았다는 생각이 드는 건 왜일까요? 참으로 이상한 일입니다. 오늘 바람은 가난한 사람들 문틈 사이로 기어 들어오는 칼바람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병원 가는 길목에 호떡을 파는 아주머니와 잉어 빵을 파는 아저씨 그리고 점심시간이 훨씬 지난 시간에 문을 열어 퇴근 후 어묵 국물에 소주잔을 기울이는 사람들을 기다리는 포장마차가 있습니다. 오늘처럼 바람이 대나무소리를 내는 날에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포장마차에서 가락국수 한 그릇에 언 손과 두 볼을 녹이는 사람들이 왠지 정겨워지는 날입니다.
강한 바람에 외출하기 싫지만 예약을 한 단골미용실로 갔습니다. 젊은 헤어디자이너는 일본으로 유학 가기 위한 첫 단계로 부산에서 열린다는 헤어 쇼에 참석하러 갔기에 배가 남산만 한 젊은 새댁에게 나의 소중한 머리카락을 맡길 수밖에 없었습니다. 갈색과 밝은 노랑 빛 중간 톤으로 염색을 했는데 꽤나 마음에 들어서 기분 좋게 미용실을 나서는데 비가 내리네요. 우산이 없었으므로 그리 멀지 않은 집까지 경주마처럼 달렸네요.
비가 내리면 이성보다는 감정과 더 친숙해지는 건 저만의 느낌은 아니겠지요. 내리는 비를 창문 너머로 바라보고 있으면 괜스레 센티(sentimental)해지고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노랫말가사에 마음이 멈칫거리기도 합니다. 햇살이 눈부시게 맑은 날 보다 비가 내리는 날이 사람과 사람사이를 더 가깝게 하고 마음속에 담아 두었던 말들을 다른 날보다 더 쉽게 터놓을 수 있다는 심리학적인 측면에서 바라본 말을 어쩐지 조금은 더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은 날입니다.
샹송이 흘러나오는 거실에 앉아 비 내리는 창밖을 무던한 마음으로 바라보고 있노라니 어느새 두 볼을 타고 내리는 뜨거운 액체가 입 근처로 떨어집니다. 짭짜름하면서도 뜨거운, 가끔은 이유 없이 울고 싶어질 때가 있습니다. 내 행복과 아무런 관계가 없어도 영화를 볼 때, 감동적인 드라마를 볼 때도 눈치 없는 눈물은 때를 가리지 않습니다. 소리 없이 흐르는 눈물은 영혼을 맑게 씻어 주는 카타르시스 역할을 하기도 하지요. 울고 난 뒤의 개운함 내지는 가벼움, 누구나 한 번쯤은 경험해 봤을 테지요. 하지만 나라는 여자는 소리 내어 울어 본 적은 거의 없습니다. 누가 볼세라 태연한 척 눈물을 훔쳐내는 여자... 아직도 쓸데없는 자존심 같은 게 남아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오늘은 그냥 마음 가는 대로 내버려 두고 싶어요. 기분 탓이겠지만 비가 내려서 마음이 더 다정해졌거든요. 가끔은 일상의 나를 벗어던져도 좋을 시간을 보내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오늘이 그런 날이네요. 가장 인간적인 나와 만나고 싶은 날.
2001년 2월 15일 - 喜也 李姬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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