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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고 낮은 읊조림

깊고 낮은 읊조림(일흔 다섯) - 이희숙

by 시인촌 2005. 12. 30.

가족 중 누구라도 함께 있을 땐 
이 세상 그 누구도 부럽지 않을 정도로 행복한 사람이 나다. 
그만큼 나를 둘러싼 배경에 감사할 줄 알고 사랑할 줄 아는 
단순 명쾌한 사람이 나다.
그런데 요 며칠 사이 혼자 있는 시간이면 
나 자신이 전혀 다른 사람이 된 듯한 착각마저 들 정도로 
많은 생각에 둘러 쌓여 호흡하기가 힘들었다.
어제에 이어 오늘도 자아와 사랑과 자유에 관해서 생각했다.
그 때문인지 오늘 하루도 어제와 마찬가지로 
끓어오르는 수많은 감정을 소화시키느라 
엄청난 정신적 공황을 겪어야만 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이런 내적 변화는 가족과 함께 하는 시간에는 찾아들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생각이 많아서인지 때맞춰 식사를 했는데도 
속이 쓰리고 허기가 진다. 
왜 이렇게 정리되지 못한 감정들이 소화불량처럼 마음에 얹혀 
나를 버겁게 하는지 모르겠다. 
전혀 예상치 못했던 일이 나를 당황하게 한다.
혼란스럽다. 
너무도 익숙한 것이 어느 순간 낯설게 느껴진다는 사실이 못 견디게 슬프고
느닷없이...
울컥...
불현듯...
이런 느낌이 얼마나 사람의 마음을 흔들어놓는지 
나이 마흔을 훌쩍 넘긴 나이에 비로소 이해하기 시작한 사실도 슬프다. 
이런 낯설음은 낯선 모로스 부호처럼 해독하기 어렵다. 

사랑이란 뭘까?
마흔을 넘긴 나이에 나이테를 몇 개 더 세우고도 
나라는 여자는 아직도 사랑이 뭔지 명쾌하게 말할 수가 없다.
그래서인지 사랑에 관한 한 영 서툴다.
그 서툰 구석은 
사랑에 대한 환상과 지치지 않는 열정과 순수를 가져다주었지만 
나라는 사람을 상대방으로 하여금 제대로 읽어 내리게 하는데 
많은 시간을 필요로 했다.
요 며칠 사이, 
내가 좀 허술한 사람이었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런 내 모습이 좀 체 그려지지 않지만 
적어도 그런 구석이 있다면 
내가 신뢰하는 어떤 이에게 
좀 더 편안한 사람으로 인식되지 않았을까 싶다.
만약 그런 사람이었더라면   
그 사람을 힘들게 하지 않았을 테고
나 역시 표정 없는 거리를 물끄러미 바라다보며 
파올로 코엘료 장편소설 연금술사에 나오는 대사
( "자신이 원하는 게 무언지 언제나 알고 있어야 해. 잊지 말게.")를 
입 속에서 주문처럼 웅얼거리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오래 전부터 사랑한다는 말보다 보고 싶다는 말을 더 좋아했다. 
보고 싶다는 말이 사랑한다는 말보다
더 사무치는 애틋한 느낌 때문이기도 하지만  
왠지 보고 싶다는 말을 하면 
서러운 마음도 눈 녹듯 풀릴 것 같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런데 요 며칠 
보고싶다는 말도 삼켜야 할 힘이 있어야 하는지
까닭 없이 목구멍에서 걸려 그만 급채를 하고 만다. 
오늘 나는 내 영혼의 심지를 점검해야 할 필요를 느낀다.
내 영혼의 심지가 닳고 닳아 
마침내 스러지는 그 순간까지도 
결코 놓쳐서도 놓칠 수도 없는 것들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2005년 12월 28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