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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과향기

머나먼 나라로 띄우는 편지 - 이희숙

by 시인촌 2005. 3. 14.

그리운 어머니!
눈을 감으면 금방이라도 보고싶은 어머니가 제 작은 어깨를 툭하고 건드리며 나타나
"무슨 생각한다고 내 오는 줄도 모르고..."핀잔 아닌 인기척을 하시며 입이 마르니 물 한잔 달라 할 것 같은 느낌이 드는 밤 깊은 시간입니다.

 

어머니, 그동안 이곳 소식이 많이 궁금했지요. 살아생전 어머니께서 밤낮으로 그저 우리 아들 잘 되게 해주소서 라고 천지신명께 정성을 다해 빌고 빌던 오빠는 작년 가을 어머니 돌아가신 후 회사 일로 홍콩과 인도네시아로 출장을 다녀오는 등 여전히 바쁜 나날들 속에서 어머니 소원대로 집이면 집, 회사면 회사, 어느 집단 어느 모임에서든 꼭 필요한 사람임을 인정받아 잘살아가고 있지만 살다가 문득 어머니의 빈자리가 더 크게 느껴지는 날이면 우리 오 남매에게 전화를 걸어 안부를 물어오곤 합니다. 오늘은 저녁을 먹고 제가 오빠네 집으로 전화를 걸었어요. 오빠가 살고 있는 부산에 어제와 오늘 1904년 이후 101년 만에 도시전체가 마비될 정도로 폭설이 내렸다는 뉴스에 별일은 없나하고요. 모두들 건강하게 잘 있다는 소식 전해드립니다.

 

어머니, 기억나세요. 몸도 약하고 마음마저 보드랍기 그지없는 셋째언니를 보며 건강하게 오래 살까 싶다며 늘 걱정하셨던 일과 자존심만은 어느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셋째언니를  못내 안타까워하셨던... 지금 곰곰이 생각해보니 언니는 자존심 때문에 웃고 울지 않았나 싶어요. 언니에게 있어서 자존심은 어쩌면 삶이요, 희망이요, 사랑 그 자체였는지도 몰라요. 지난 겨울 언니네 식구들이 우리 집에 놀러왔는데 모두들 건강한 모습이어서 참 보기 좋았어요. 하고 있는 일도 재미있고 공부도 재미있어 살맛 난다는 언니를 보니 어머니 생각이 절로 났어요. 야무져서 어디 내놓아도 살아날 거라고 믿는다는 저보다 어쩌면 지금의 언니가 훨씬 더 강한 사람이 되어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과 함께...    

 

오십대를 살아가고 있는 큰 언니네와 둘째 언니네는 별다른 변화 없이 잘살고 있어요. 변화가 없다는 건 어찌 보면 그만큼 근심이 없다는 뜻도 되겠다는 생각을 두 언니네를 보면서 느끼곤 해요.

 

어머니 돌아가신 후 우리 집에 많은 이야기 거리가 생겼는데 아이들 이야기부터 해드릴게요. 내 고집을 쏙 빼 닮은 딸 신애는 올해 K여중에 입학을 했어요. 집에서 거리는 좀 멀지만 가고싶어했던 학교라 즐거워해요. 거리가 멀어서 아침등교를 아빠 차로 하는데 반에서 2등 아래로 떨어지면 등교를 버스로 하든지 걸어가든지 신경 쓰지 않겠다는 아빠와 중학교에서도 긴장을 놓치지 않고 1등을 했으면 좋겠다는 내 욕심에 아이가 조금은 부담스러워하지만 할 수 있는 사람이 행동하지 않고 노력하지 않으면 잘못된 거라고 말해주었어요. 요즘 들어 부쩍 외모에 관심가지는 것과 중학교에 입학을 했는데도 텔레비전을 즐겨보는 습관이 쉽게 고쳐지지 않아 학업을 소홀하지는 않을까 은근히 걱정되지만 당분간은 조금 물러난 거리에서 지켜보기로 했어요.

 

또래 사내아이들처럼 컴퓨터게임도 좋아하고 친구들과 장난치며 노는 것도 좋아하지만 정 많고 속이 깊어 가족들을 감동시키는 순간이 많은 아들 재석이는 작년 겨울 담임선생님추천으로 수학영재시험을 쳤는데 1차 합격했어요. 2차 시험이 며칠 남지 않아서 요즘은 특별히 일요일에도 입시학원에 공부하러가 보기에 안쓰럽지만 한편으로는 대견하기도 해요. 하루는 그 녀석이 학원에서 돌아오자마자 "엄마, 수학선생님께서 저보고 인터넷에 접속해서 아이큐테스트를 받아보래요." 하는 게 아니겠어요. "갑자기 IQ테스트는 왜?" 라고 물었더니 다짜고짜 한국멘사(MENSA KOREA)로 들어가서 꼭 받아 봐야한다는 말만하대요. 그래서 저녁을 먹고 IQ테스트를 받아보았지요. 신애와 함께... 그런데 놀라운 결과가 나왔어요. 두 아이가 또래아이들보다 IQ가 높을 거라는 생각은 했지만 재석이는 한국멘사에 들어갈 수준이고 누나인 신애는 멘사에 들어갈 정도는 아니지만 IQ수치가 아주 높은 편이어서 제 마음을 기쁘게 했어요. 어머니도 우리 오 남매 기르실 때 이런 심정이었나요? 자식이 또래아이들 속에서 뭐든 좋은 결과를 나타내면 함께 빛나는 느낌이 된 것 같은 기분...

 

어머니 막내딸은 어머니 돌아가신 후부터 건강에 빨강 신호등이 켜져서 위암으로 일찍 세상을 등진 아버지와 작은 아버지 그리고 후두암으로 너무도 아까운 삼십대라는 나이에 세상을 떠나신 고모 생각에 마음한구석 씁쓸했지만 어머니 살아 계실 때와 마찬가지로 내 앞에 펼쳐진 나날들을 좀 더 의미 있고 보람되게 사용할 수 있게 스스로를 엄격하리만큼 관리하며 살고 있어요. 그 날 자고 그 날 일어나는 습관도 여전하고 집안청소와 빨래하는 것과 하루 세끼 식사준비 하는데 투자하는 시간도 이전과 별로 달라진 것 없이 부지런을 떨고 아이들의 학습에 도움이 되는 공부를 가르칠 때에는 엄격하지만 놀이시간에는 누구보다도 허물없이 망가질(?) 준비가 되어있는 친구 같은 엄마의 모습도 변함 없고 건강을 위해서 다니던 수영장도 예전처럼 열심히 다니고... 어머니 살아 계실 때와 비교해서 흡족하지 못한걸 굳이 꼽으라면 신랑의 권유도 있었지만 내 속에서 끓어 넘치는 끼 혹은 열정을 차분하게 순화시키기 위한 작업으로 안성맞춤이라는 생각에 시작한 그림 그리기는 어머니 돌아가신 후 건강과 맞물려 한동안 열중하지 못해서 별 진전이 없다는 거예요. 그렇지만 봄에는 더 새로운 마음으로 열심히 하려고 호흡을 고르고 있는 중이에요.

 

언젠가 어머니께서 저희 집에 오셨을 때 제게 당부를 하셨지요. 밤에는 오서방 혼자 두고 글 쓴다고 컴퓨터 있는 방으로 올라가지 말라고... 그래서 시간적인 여유가 생겨도 글을 쓴다는 이유로 밤늦은 시간 컴퓨터 앞에 앉아있는 시간을 의식적으로 만들지 않고 있어요. 아주 가끔 짧은 시간 컴퓨터 앞에 앉아있는 경우가 있긴 하지만 텔레비전을 즐겨 보는 신랑 옆에 앉아 애교도 떨고 말벗도 되어주니 나는 무엇 때문에 사느냐는 소리를 더 이상 듣지 않아도 되어 오히려 마음은 나만의 시간을 가질 때보다 훨씬 더 편해요. 그래도 가끔은 살면서 차 오르는 생각과 느낌을 놓쳐버리기 일쑤인 것이 아쉬워 혼자말로 이러다 글 쓰는 리듬마저 잃어버리는 건 아닌지 몰라 하고 중얼거릴 때가 더러 있지만요.

 

어머니, 생각나세요. 늦은 나이에 막내사위를 보아서인지 아니면 심성 곱고 반듯한 행동이 어여뻐서인지 어머니는 아주 가끔 제게 막내사위의 소식을 물을 때면 오서방이라고 부르는 대신 이름인 오○○ 하고 불렀지요. 친정식구 누구 할 것 없이 다 좋아하는 어머니 막내사위는 주말을 제외한 저녁시간이면 매일같이 함께 요가교실로 가서 요가를 배워요. 퇴근 후 특별히 하는 운동이 없던 신랑에게 요가를 하자며 지난달에 등록을 했는데 요가는 여자보다 오히려 남자들에게 필요한 운동이라며 하루에 한시간 투자할만하다는 소리를 하는 신랑을 보면 덩달아 행복해져요. 명상을 통해서 하루를 반성하고 지친 심신의 피로를 요가운동을 통해서 말끔히 씻어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운동을 하러가고 집으로 돌아오는 그 짧은 시간동안 아이들 이야기와 세상 살아가는 많은 풍경들을 주고받을 수 있어서 좋아요.
   
어머니, 며칠 전 전화로 신랑이 "희야 주민등록번호 불러줄래?"하고 물어서 무슨 일인가 궁금했는데 퇴근한 신랑이 제 명의로 되어있는 이 집을 화재보험에 들었다는 말을 해 아주 오래 전 기억 속으로 잠시 여행을 했어요. 제가 학원강사라는 직업을 가졌을 때 퇴근 후 저녁을 먹고 가스 불에 삶을 빨래를 올려놓았는데 빨래가 끓는 동안 방안에서 잠시 휴식을 취한다는 게 피곤함에 나도 모르는 사이 벽에 기대어 졸았던 적이 있었는데 선잠에 냄새가 나는 것 같아 놀라 깨어나 보니 그때 불이 났다는 걸 어머니도 들어서 아실 거예요. 다행히 내 놀란 소리에 잠이 깬 신랑의 순발력으로 큰 피해를 입지는 않았지만 그 일이 있은 후 한동안 다른 집에서 바람을 타고 건너오는 냄새에도 혹시 하는 생각에 깜짝 놀라며 집안을 살피곤 했던... 많은 시간이 흐른 지금은 잠들기 전이나 외출을 할 때면 집안구석구석을 다시 한번 꼼꼼히 살피는 습관이 생겨 한번의 실수가 오히려 약이 된 결과가 되었지만 단 1%의 가능성이 있어도 준비를 하는 신랑을 보면서 언젠가 어머니께서 하신 말씀을 떠올렸어요. "너 하나만은 평생 아끼며 사랑해 줄 사람이라는..." 

 

어머니, 살면서 여린 시선을 멈추게 하고 목젖을 떨리게 하는 수많은 풍경들 속에 어머니라는 이름의 따스한 향기가 못내 그리운 날이 얼마나 많은지 몰라요. 어머니라는 이름을 지울 수 없어 여전히 휴대전화에 보관하고 있는 어머니 집 전화번호를 눌렀을 때 결번이라는 차가운 음성에 화들짝 놀라며 숨죽여 울었던 순간에도 길을 걷다 어머니의 모습을 닮은 낯선 할머니의 뒷모습을 만났을 때에도 매사에 성실하고 가족에 대한 책임감이 강해 내 인생에 있어 가장 훌륭한 선택은 결혼이었다는 생각을 들게 하는 남편과 내 삶의 의미를 더 한층 밝고 건강하게 결집시켜주는 어머니라는 이름을 선물로 준 두 아이가 있어 스스로 행복한 여자라고 생각하면서도 문득 인간이 지닌 원천적인 고독의 그림자와 맞닥트릴 때면 왜 그렇게도 어머니 생각이 간절한지요.

 

아, 어머니...
올해는 작년보다 꽃이 피는 시기가 많이 늦습니다. 이맘때가 되면 우리 집 정원에 노란  산수유 꽃이 기지개를 활짝 펴고 함박웃음을 터트리는데 지금은 꽃샘추위 때문에 아직도 온 몸을 웅크리고 있어요. 그래도 지금 제 마음은 누구보다도 먼저 봄을 가까이 느끼고 있어요. 어디선가 봄을 닮은 아이들의 화사한 웃음소리가 들리는 듯 해요. 아래층 거실 한켠에 피어 있는 천리향이 열어둔 문 사이로 날아들어 제 보드라운 감성을 톡하고 건드려요. 어머니가 몹시도 보고싶은 이 깊은 봄밤에...

 

 

 


- 2005년 03월 06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