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폭탄을 맞은 날씨 덕분에 택배로 보낸 김치와 반찬 몇 종류가 든 아이스박스를 하루 늦게 받은 서울 사는 시아버지는 낯선 물건을 경계하는 아이처럼 아이스 팩에 대해 몇 번이고 물으신다. 효자 아들은 “아버지, 파란색 젤리 같은 건 먹는 게 아니고 얼음 대신 넣은 거니까 버리지 마세요.” 알았다는 대답 대신 “말랑말랑한데 안에 있는 거 쏟아버릴까?” “녹아서 그러니까 음식물 다 꺼내고 그대로 넣어두세요.” 음식 보낼 때마다 한 자리 차지한 아이스 팩, 눈에 익었을 법도 한데 기억에 없으신 모양이다
통화가 끝나는가 싶었는데 캔이 아닌 포장에 든 스팸이 이상하다고 전화기를 잡고 늘어지는 시아버지와 같은 말을 테이프 되감기 하듯 대답하는 효자 아들 “우리 집에 오셨을 때 먹었던 스팸하고 아버지 서울로 가실 때 가방에 넣어준 스팸하고 똑같은 거예요. 두꺼우니까 반으로 잘라서 네 등분해서 드세요. 달걀에 부쳐도 맛있고 그냥 부쳐 먹어도 맛있어요.” 삼십여 분 동안 입의 혀처럼 설명하는 남편 옆구리에 찰싹 붙어있던 내게로 용기만 달리했을 뿐인데 동문서답하는 시아버지의 나이 듦의 슬픔이 고스란히 전해져온다
나이 들수록 학습을 해야 한다던 딸아이의 말이 뜬금없이 목에 걸린다. 지금은 낭만처럼 마시는 블랙커피가 쓴 약처럼 느껴지는 그런 날이 내게도 올지 모른다고 생각하니 알게 모르게 영토를 넓혀가는 새치가 신경 쓰인다. 하늘은 여전히 눈이 내릴 기세다
2010년 12월 - 喜也 李姬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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