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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과향기

나만의 연인인 당신을- 이희숙

by 시인촌 2004. 2. 27.

미범씨,
아침으로 가는 이 길목이 온통 하얀 세상으로 뒤덮였어.
간밤 우리가 잠든 사이 눈발이 소리 없이 날렸나 봐.
며칠 전, 당신과 내가 마음 속 이야기를 오랜 시간 주고받은 끝에
합의점을 찾은 아침으로 가는 이 시간
아직은 익숙하지 않지만
그래도 허락된, 혹은 인정한 이 시간이 솔직히 편하다.

  

미범씨,
날 더러 십 년을 기다려 달라고 했다가
그 시간이 너무 길다 싶으면 육 년을 기다려 달라고 했나.
그때까지만 내 욕심을 줄여달라고...
그 후엔 내가 하고 싶은 분야의 공부와
글쓰는 일과 관련 된 여행을 해도 말없이 다 바라 봐 주겠다고...

  

그래... 당신 말대로 난 분명 변했어.
부인하지는 않아.
아름다운 사람, 참 된 인간이고자 노력하며
아내라는 이름과 엄마라는 이름을 빛내며 살았던 내 자리에
나 자신의 색깔을 찾는 싹들의 행진이
세월의 나이테 하나를 더 할 때마다 더 깊고 커진 거... 


처음엔 그 변화가 너무 미세해서 느끼지 못했는데
어느 순간에 변해있는 내 자신을 눈치채고 말았어.
나 그렇게 변해있었던 거야.

그렇다고 해서 지금의 내가
아내라는 이름과 엄마라는 이름을 소홀히 한다든지
그 이전만큼 행복해 하지 않는 다는 이야기는 결코 아냐.

 
그건 당신도 인정하는 부분이잖아.
다만 당신이 생각하는 아름다운 여성상이나
아름다운 인간의 범주 안에 들기란 쉽지도 않을뿐더러
당신이 생각하는 사람다운 사람...
그 얼마 되지 않는 몇 % 안에
당신의 아내가 있다고 인정한 나라는 사람이
그 안에서 자꾸만 멀어지는 것 같아 
당신으로 하여금 긴장하게 했는지도 모르지.  

 

미범씨,
우리를 아는 많은 사람들이
어쩜 그렇게 예쁘게 사니 하고 부러워하는 것처럼
우린 여전히 우리들 삶 속에서
서로 기대며 자라는 나무로서 잘 자라고 있는 거야.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편인 당신으로 하여금
엄격한 스승역할을 할 수밖에 없도록 한 주 된 요인은
바로 나라는 여자가 나를 위해 사용하는 시간이
그 이전보다 많이 늘었다는 게 문제였어.

운동하러 수영장에 간다든지 그림을 그리러 문화센터에 가는 건
아무런 문제가 없는데
오직 하나 컴퓨터 하는 아내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거야.

 
글을 쓴답시고 집안 일이 다 끝났다고 생각하는 시점에서
위층으로 올라가 버리는 나 때문에
그 동안 당신은 아내의 시간 속에 함께 할 수 없는 자신이 싫었지만
사색의 방문을 온전히 닫지 않고 열어두었던 내 마음과 달리
내 시간을 방해하는 것 같아
마음대로 들어 올 수 없었던 당신에게 고맙고 미안해.

 

여느 남자들과 달라 사업상 일이나 여행정보가 아니면
컴퓨터 앞에 서성이는 일이 없는 당신이
나를 이해하기란 그리 쉽지는 않았을 텐데
물꼬처럼 터진 당신의 날카로운 지적 사실 하나도 틀린 말은 아니었어.

 

소설을 쓴답시고 혹은 저장되어 있는 글들을 옮긴다는 명분으로 
위층으로 올라가 버리는 나한테서
예전의 다정다감하고 사랑스러운 모습을 찾기가 쉽지 않았겠지.
아무리 내 나름대로 내 할 일을 다 한 뒤에 짬을 내어 시간을 사용한다고 해도
당신 혼자 텔레비전 보게 하고 당신 혼자 책을 보게 해서 미안해.

 
아내인 내가 안방으로 건너 와 줄 때까지 기다려 주는 당신을
어쩌면 난 그 동안 당연하다고 생각했는지도 몰라.
솔직히 아마 그랬던 것 같아.
나, 참 이기적인 사람이었다는 걸 이제야 알겠어.

  

어제, 그제 당신이 퇴근 한 그 이후의 시간
난 약속대로 사색의 방을 외면했어.
내 욕심 보다 우리 가족의 평화와 행복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어.
내게 있어서 당신과 두 아이는 그렇게 우선 순위야.

  

참 좋더라.
당신 옆에 기대고 앉아 손을 만지작거리는 내게
당신이 보여주는 무언의 느낌들...
따스하고 부드러워서......

당신이 그랬지.
집에 들어오면 반겨줄 내가 있어야 할 자리에 없으면
허전하고 뭔가 텅 빈 것 같은 느낌.
애들이나 어른이나 그런 감정을 느끼는 건 하나도 다르지 않다고...

  

아침으로 가는 길목에서 잠 든 당신을 두고 사색의 방으로 건너오는데
참 많이 미안하고 고맙더라.
내 모습이 당신 눈앞에 보이기만 해도
당신 외롭지 않았을 텐데 하는 생각하니까...

  

아침에 일어나면 애들은 좋아서 난리겠다.
사실, 나는 우리 집 정원에 꽃망울을 터트린 산수유꽃잎이 얼까 걱정이지만...
참, 마당 여기저기에 수선화 촉이 뾰족뾰족 얼굴을 내밀었더라.
자연은 그렇게 우리에게 교훈을 주는 거야.
기다림 이상의 강인한 생명력을...
우리 오늘도 사랑이라는 이름 속에서 행복해지자.
함께......

  

사랑한다.
내 아름다운...
나만의 연인인 당신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