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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과향기

갑자기, 왈칵, 느닷없이, 문득... 당신이 그리워져요 - 이희숙

by 시인촌 2006. 9. 30.

사랑하는 미범씨,
커피 향이 그리워지고 사람이 그리워지는 가을이 왔어요.
요즘 들어 나한테서 부쩍 시간 참 잘 간다는 말을 자주 듣지요.
시간 가는 게 아쉬울 정도로 잘 간다고 느끼는 사람은
살아감이 고단하지 않아서 라는 누군가의 말도 있지만
분주한 일상 속에서도 우리들의 가을을 이야기 할 수 있는 건
내 삶이 당신으로 인해 아름답게 물들고 있기 때문이겠지요.


 

며칠 전, 퇴근해 들어오는 당신 얼굴을 빤히 쳐다보는 내게
당신은 빙그레 웃으면서 왜? 라는 말로 내 반응을 살폈지요.
대답 대신 나는 이제 막 아장아장 걸음을 떼는 아이처럼
까치발을 세워 당신을 와락 안아버렸지요.
나의 느닷없는 행동에 칭찬 받은 아이처럼 기분이 좋아진 당신은
말없이 나를 당신 품으로 끌어안고는 왈츠를 추듯 몇 발자국 걸음을 내딛었지요.
그렇게 서로를 잠시 동안 끌어안고 있는 동안
나는 당신을 닮아가고 있는 내 모습을 발견했어요.

 


저녁을 먹고 소파에 나란히 앉아 커피 마시며 텔레비전을 보다가
갑자기 궁금한 게 생각난 사람처럼
"오○○, 가을 타? "하고 물었지요?
텔레비전을 보고 있던 시선을 나에게로 돌린 당신은
내 눈을 부드럽게 바라보며 그런 거 모른다고 대답했지요.
그 때 그렇게 대답 할 수 있는 여유를 지닌 당신이 참으로 고맙고 부러웠어요.
많은 남성들이 이름 모를 쓸쓸함의 정체에 힘겨워하는데
말의 진실을 떠나서라도
아내인 나한테 주저하지 않고 그렇게 대답을 해주는 당신은
보통 남자는 아니라는 생각, 그 순간에 또 하게 되었어요.

 


미범씨,
사람에게는 자기이름과 나이에 어울리는 자리가 있기 마련이지요.
자신에게 부쳐진 수많은 이름들에게 어울리며 사는 사람이
이 세상에 얼마나 될지 가늠하지 못해도
당신이라는 남자는 정말이지 당신에게 이름 부쳐진 많은 이름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아름다운 사람이에요.
그런 당신과 살면서 내가 배운 건
사람이니까 노력하면 될 수도 있는 거구나 하는 거였어요.

 


어린 시절, 종가 집에서 나고 자란 영향도 있지만
내게 부쳐진 몇 개의 이름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사람이 되고 싶었어요.
그런데 요즘 내 마음에 약간의 변화가 일어났어요.
내가 당신이나 아이들 눈치 보며
내 시간을 마음대로 사용하지 못하는 사람도 아닌데
내가 좋아서 지키고자 노력하는 것들 사이에서 스스로 낮추며 살았던 일상들이
급변하는 시대를 살고 있는 많은 사람들에게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는 사실 앞에서
나도 이제 조금은 내 자신을 돌보는 시간을 더 많이 가져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마흔을 넘긴 나이를 살아오면서 당신과 나라는 사람이
삶에 위기를 느낄 만큼 고민해야 할 일들과 마주하지 않아도 된 것은
기본에 충실한 삶을 살려고 노력한 때문이라 생각했는데
오늘 그 누군가와의 전화 통화에서
나라는 여자는 당신과 아이들 때문에 내 마음대로 한 달에 한 두 번도 
혼자만의 시간을 온전히 낼 수 없는 사람으로 인식되었다는 게 속상했어요.
그게 아닌데 정말 그게 아닌데...

 


당신도 알잖아요.
나라는 여자가 현모양처를 꿈꾸면서도 나 자신을 아주 중요시하는 사람이란 걸,
덕분에 이 집으로 이사 오기 전 나의 일상은 친구랑 여럿이 혹은 혼자
음악회, 연극, 갤러리, 영화, 뮤지컬, 여행 등
나를 찾고자 하는 곳에 시간과 돈을 투자했지요.
분위기 좋은 음식점은 말할 것도 없고
남자인 당신보다 노래방도 더 많이 갔지만 단 한번도 내 자리를 잊은 적은 없었어요.
그런 나였기에 여자가 밖으로 도는 걸 누구보다 경계하고 싫어하는 당신이지만 
내 시간을 사용하기 위해 남보다 시간관리에 엄격했고 더 많이 부지런했던 나를 인정해주었지요.

 


지금껏 살면서 단 한번도 가족들 아침 식사 거르게 한 적 없고
가족들 중 누구보다 먼저 잠자리에 든 적이 없다는 건
내게 있어 내 할 일은 하고 산다는 행동 그 이상의 정성이 숨어있었는데
오늘 그 누군가와의 전화 통화에서
그동안 내가 그토록 중요시하며 노력했던 것들이
다른 누군가에게 있어서는 해도 그만 하지 않아도 그만인
별 대수롭지 않은 일일 수도 있다는 사실이 온 몸의 힘을 빼게 하네요.

 


인생에 있어 중요하지 않은 시기가 있겠냐마는
아이들이 초등학교에 다니고 중학교에 다니는 최근 몇 년간
정말 엄마가 필요한 중요한 시기구나 하는 생각을 가슴 깊이 느껴  
사람을 좋아하고 친구를 좋아하고
끊임없이 뭔가를 배우기를 갈망하던 것으로부터 많이 자유로울 수 있었는데
다른 이들에게는 이런 내 모습이 답답하게 느껴질 수도 있나봐요.
그래도 꼭 이런 이유들 때문이라고 말 할 수는 없지만 
지금까지는 당신과 내가 꿈꾸던 바대로
가정도 아이들도 모두 성장 할 수 있어서 위로가 돼요.

 


아이들에게 늘 상위권을 욕심내는 못난 엄마지만
공부가 인생에 전부가 아니라는 걸 알고 있고 인정하기에
꿈꾸는 미래가 현실로 연결되지 않는다 해도
노력한 부분에 대해서는 칭찬해주는 멋있는 엄마가 되고 싶어요.
사람마다 저마다 꿈꾸는 행복론이 다르고 성공철학이 다르듯
아이들 역시 그들만이 꿈꾸고 인정하고픈 성공과 행복이 있을 테니까요.

 


아주 가끔 먼 어느 날에 찾아 올 당신과 나의 아름다운 노년을
상상 속에서 만나곤 하는데 제일 먼저 그려지는 풍경은
저 남자 참 괜찮은 사람이야, 저 여자는 또 어떻고...
얼굴은 보이지 않지만 여기저기서 우리를 칭찬하는 목소리를 만나는 상상을 해요.
그런 상상과 마주하면 가슴에 날개를 품은 듯 얼마나 기분이 좋은지...
아, 생각의 골짜기를 따라가니 여전히 나의 환한 종알거림을 좋아하는 당신과  
당신 이마에 기찻길처럼 여러 갈래로 고정되어 있는 주름을
부담스러워하지 않고 바라만 봐도 애틋함을 느끼는 내가 보이네요.

 


미범씨,
누군가 말하더군요. 
부부가 닮아간다는 말은 얼굴에 있는 80개의 근육을 함께 사용했기 때문이라고,
그만큼 부부로 살아가는 동안 함께 웃고 함께 고민하고
함께 울어야하는 시간들이 많다는 뜻이기도 하지만
내게 있어 부부가 닮아간다는 말은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며 구속이 아닌 
상대에게 절로 흡수되는 기쁨을 찾아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해요.

 


두서 없는 이야기 언제쯤 당신과 마주하게 될지 알 수 없지만
벌초하러 고향 가고 없는 오늘
내게 이야기하듯 당신에게 편지를 쓰고 싶었어요.
아니, 당신에게 편지를 썼다고 하기보다
지금의 내 살아가는 풍경을 들여다보고 싶었어요.
스스로에게 들킨 내 모습은 야무지고 욕심 많은 나도 있지만
때때로 혼자만의 시간을 갖고 싶어하는 나도 있음을 보고야 말았어요.

 


살면서 더러 나라는 여자가 당신과 아이들보다
나 자신을 먼저 생각할 때도 있을 거예요.
그럴 땐 억지로 나를 구속하려들기보다
내 있어야 할 자리를 아름답게 물들일 수밖에 없도록 여건만 만들어줘요.
그러고 보니 우리 한번도 치열하게 싸운 적이 없네요.
우리 서로 상대를 불편하게 하거나 아프게 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가슴 속 깊이 자리한 때문이기도 하지만
부부로 살아온 16년이라는 세월을 거슬러 올라가 보면 
사랑이라는 이름의 권리를 주장하기보다
의무를 먼저 다하고자했던 우리 자신의 모습이 보이네요.
덕분에 우리는 부부로 사는 사람들이
경험해 봄직한 여러 사건 혹은 상처들과 만나지 않아도 되었네요.

 


흐린 가을 하늘에 내 마음 빼앗겨버렸는지
오늘은 이 생각 저 생각 참 많은 생각이 벽을 타고 기어오르는 담쟁이 넝쿨처럼
이리저리 많이도 뻗어 내리네요.
그래도 이 순간 내 가슴과 머리는 여전히
삶과 사랑 그 길목에서 만나는 황홀한 행복을 가장 먼저 기억하고 있어요.
그러니까 먼 훗날 두서 없는 내 이야기를 읽어 내릴 기회를 만난다면
당신 여자가 어느 날에 이런 생각도 했구나 하는 정도만 이해해줘요.

 


갑자기, 왈칵, 느닷없이, 문득... 당신이 그리워져요.
그래도 전화는 하지 않을래요.
이런 내 마음, 이해하지 못한다고 말하지 마세요.
여자는 말이에요.
가끔 순간의 간절한 그리움을 혼자만 갖고 싶어하는 습성이 있어요.
늙어 할머니가 되어도 끝끝내 마음에서 놓칠 수 없는 게
사랑이라고 믿는 나라는 여자한테는 더 더욱...

 


조금 있다가 저녁 준비하러 아래층으로 내려 갈 거예요.
지금쯤이면 당신은 안전운전하며 집으로, 집으로 향하고 있겠지요.
내 인생의 든든한 동반자, 나중에 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