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으로부터 팔 년 전, 친정어머니께서 뇌출혈로 쓰러졌다가 기운을 차리신 적이 있는데 그 일을 겪고 나신 후 어머니의 기억력과 몸 상태는 나날이 눈에 뜨게 불안정해져갔다. 열 여덟 꽃다운 나이에 이씨 가문으로 시집와서 오 남매 낳고 살아오신 평생동안 열 남자 부럽지 않은 열정과 부지런함, 여자로서의 야무짐과 손맛 깔끔하기로 소문나셨던 어머니의 모습은 더 이상 어머니 자신의 모습이 아닌 상황에까지 이르러 오 남매를 비롯해서 어머니를 잘 아는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아, 옛날이여... 라고 이름 부칠 수밖에 없는, 기억 속에 살아 숨쉬는 과거형으로만 존재할 뿐이었다.
나이 들면 집안 곳곳에 있는 물건들을 아깝다 생각하지 말고 과감히 정리해서 버릴 것은 버려야 집안 정리하기도 수월하고 보기에도 깔끔해서 좋은데 어머니는 자신의 젊음과 열정이 함께 숨쉬었던 추억의 물건들을 쉬 버리지 못하고 한쪽으로 밀쳐두어 집안 구석구석 오래된 물건들이 하나 둘 쌓여 그 영역을 점차 넓혀나갔다. 딸자식들과 아들내외가 고향집을 찾을 때면 보기에도 좋지 않고 그대로 둔다고 해도 사용할 일이 거의 없겠다 판단되는 물건들은 눈에 띄는 대로 버리곤 했지만 찾아뵙는 시간이 길면 길수록 버리지 못하고 모아둔 물건들은 줄어들기는커녕 금새 또 버린 부피만큼 늘어나 그 옛날 대청마루를 반질거리도록 닦아 파리가 낙상한다던 우스개 소리가 무색할 정도로 검은색으로 변한 종가 집 대청마루처럼 사라져 가는 종가의 서글픈 전설에 한몫을 더했다.
언젠가 시댁에 갔다가 친정에 들른 큰언니가 집안 곳곳에 쌓여진 그것들을 발견하고 눈에 띄는 대로 마당으로 꺼내 놓고 불을 질러 태웠는데 혼자 사는 노인의 짐을 덜어 집안이 한결 더 깨끗해진 것까지는 좋았는데 어머니마음은 그게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오랫동안 자신의 손때가 묻은 것까지 허락 없이 버려서 못내 아쉬웠던 어머니는 막내딸인 나와의 전화통화중
"너 큰언니 집에 오면 내 겁이 난다. 무슨 지랄한다고 확인도 안하고 보이는 대로 불 싸지르는지, 미안하다. 내가 잘 챙기지 못해서..."
어머니께서 그런 말씀을 내게 하신 까닭은 내 나이 스물하고 몇 해를 넘기지 않았던 어느 가을날의 기억을 두고 하신 말씀이다. 그때 역시도 시댁에 갔다가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친정에 들른 큰언니는 집안대청소를 한답시고 큰방 작은방 가리지 않고 눈에 보이는 대로 이것저것 마당으로 꺼내 불을 태웠는데 그 일로 인해 내 십 수년의 추억이 한꺼번에 날아가 버리는 기막힌 사건이 터지고 말았다.
중학교 1학년이 되던 그 해 3월부터 결혼하기 전까지 만 십 오 년이라는 세월동안 고향집을 나와 자취생활을 했던 나로서는 국민학교(지금의 초등학교)시절 받았던 우등상, 개근상, 임명장은 두말할 것도 없고 교내대회에서 받았던 각종상과 졸업앨범까지, 어디 그것뿐이었다면 그래도 다행이라는 말이 나오겠지만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시절까지 보관해두고 싶은 물건들을 모조리 고향집으로 옮겨두었던 이유로 스무 몇 해를 살아오는 동안 소중하다 생각되는 것들이 한꺼번에 활활 타오르는 불꽃이 되어 사라지고 말았다. 그 당시 내 짧은 생각으로는 자취방을 옮기는 상황이 발생하면 그동안 모아둔 상장이며 졸업앨범, 사진첩들은 짐이 될 뿐만 아니라 분실할 염려도 있겠다 싶어 어머니가 살아 계시는 고향집에 두면 안전하기도 하겠거니와 일년에 몇 차례 고향집을 찾을 때마다 추억처럼 꺼내 볼 수도 있으니 이래저래 좋을 것 같다는 생각에 그런 결정을 내렸는데 그 날 큰언니가 일일이 확인하지 못하고 불에 태운 한 순간의 실수로 초등학교 시절 받았던 그 많은 상장은 물론이고 초등학교 시절 사진 한 장도 지니지 못하는 불운을 경험하고야 말았다.
그런 와중에도 사진첩에 합류하지 못하고 책갈피 속에 들어있었던 중학교 사진 몇 장과 고등학교, 대학교 사진 몇 장이 어쩌다 내 수중에 있게 된 것이 그나마 위안이라면 위안이겠지만 아무튼 지금 현재 내가 가지고 있는 사진 중 가장 어린 시절의 내 모습은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 합천 해인사로 가족여행을 떠났던 그 해 봄, 중학교 교복을 입고 삼층석탑 앞에서 찍은 사진이 가장 어린 나의 모습이 되고 말았다. 그렇게 어머니는 내 젊은 날의 추억을 한눈에 봄으로서 더 오래 기억할 수 있는 상장이나 졸업앨범 등을 잘 보관했다가 건 내주지 못한 것이 늘 마음에 걸렸던 모양이었다.
지난 달 친정어머니 삼우제를 끝낸 그 날, 하나도 남아있지 않다고 생각한 그것(우등상, 임명장)을 받아들고 내가 어떤 감정에 둘러 쌓였는지 한마디로 표현해내기란 그리 간단하지만은 않다. 채 사르러지지 않는 기억 속에 존재하는 일들이 마치 꿈인 양 올케로부터 그것을 받아든 나는 한 동안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딱히 말을 잃어버린 것도 아니건만 말을 잃어버린 사람처럼 건 내 받은 그것을 눈이 시리도록 내려다보고만 있었다. 내 서 있는 공간과 상황도 잊은 채 ...
얼마나 지났을까? 사람들이 오고 가는 대청마루를 지나 아무도 없는 마당 한켠으로 나와 그것을 소리내어 읽어보았다. 내가 읽어 내리는 소리는 아주 나지막해서 듣는 이는 없었지만 나는 홀로 아팠다. 불에 타 하나도 남은 게 없다고 생각했는데 어머니의 죽음으로 인해 더 이상 아무도 살지 않는 집이 되어버린 사 칸 짜리 종가 집을 정리하다 나온 선물(두개의 상장)로 인해... 그런 순간에도 아픔너머 찰랑대는 추억이란 이름의 그리움 사이로 볕이 들고 바람이 찾아 들어 책갈피 속 단풍잎처럼 유년의 기억이 내 마음 속 한켠에 한 장 한 장 채워져 그 순간만큼은 어머니의 죽음마저 잠시 잊어버릴 정도로 가슴이 따스해졌다.
오늘 밤 나는 꿈속에서라도 내 어머니가 살아 계셨던 시절로 되돌아가 그리운 사람들과 그리운 풍경들을 만나고 싶다. 고무줄 놀이, 땅따먹기 자치기, 술래잡기,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등등의 놀이를 하며 해지는 줄 모르고 놀았던 친구들도 만나고 싶고, 가을이면 구절초를 유난히 좋아하던 어린 나를 위해 아버지가 꺾어와 건 내 준 구절초 향기도 맡고 싶고, 위로 대학 다니는 오빠와 결혼할 나이에 이른 언니가 있어 어머니의 짐이 너무 커 보였기에 결국 내가 하고 싶은 공부와 내가 원하는 대학을 포기하고 장학금을 준다는 대학으로 입학을 하던 날, 결코 즐거워하지 않을 내 성격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계신 어머니께서 자취 집으로 오셨다 막내딸과 하룻밤 잠도 주무시지 않고 잠시 쉬었다 다시 버스를 타고 고향집으로 내려가셨던, 어머니가 가신 후 밑반찬을 싸 들고 온 보자기 속에서 발견한 밥 굶지 말고 먹으라는 짧은 편지를 발견한 나는 사랑한다는 한마디 말 없어도 어머니가 얼마나 나에게 미안해하셨는지, 얼마나 나를 사랑하셨는지를 알 수 있었다.
결혼한 여자에게 있어서 친정이란 갈 수 없어도 마음만은 늘 그곳에 머물고 싶은 바램이 있는 영원한 꿈의 동산이요, 마음의 고향이다. 구월 초입부터 핀 색깔을 달리 하는 국화꽃 몇 종류가 정원 곳곳에 아직도 그 자태를 뽐내느라 질 줄 모르고 계절을 잃어버린 장미며 개나리, 사루비아가 제멋에 겨워 가을바람을 불러 들여 소꿉놀이를 하고 있는 이 가을날, 그 누군가 내게 이 가을이 행복하냐고 묻는다면 나는 대답대신 빙그레 미소지으며 고개를 끄덕이고 싶다. 살면서 버릴 수 없어 아팠던 꿈도 있었지만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는 행운이 내게 단 몇 분이라도 허락된다면 오늘 나는 지금의 내 성장에 디딤돌이 된 어머니와 내 삶의 배경이 되었던 수많은 시간과 풍경들 속에 존재했던 사람들을 우연히 찾아든 행운처럼 다시 한번 껴안고싶다. 그리하여 가슴속에 담아두었던 못 다한 이야기를 꺼내 고마웠다는, 미안했다는, 사랑했다는 말을 환한 미소와 함께 선물처럼 건 내고싶다.
2004년 10월 - 喜也 李姬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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