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도 첫사랑이 있었을까?
있었을 법도한데 도무지 기억을 해낼 수가 없다
첫사랑이 언제 찾아왔는지 누구랑 했는지...
첫사랑이라고 이름 붙일만한 사랑을 하기는 했는지...
칠월 초입에 들어선 어느 날, 초등학교 6학년인 딸이 저녁밥을 먹다말고 큰소리로
"엄마, 엄마 첫사랑은 누구야?"
"갑자기 별게 다 궁금하네. 계속 밥 먹었으면 좋겠는데..."
순식간에 질문을 받아서인지 마주보고 앉은 식탁에서 묵묵히 식사하는 남편을 의식한 때문인지 순간 나는 적잖이 당황했다.
밥을 먹다 말고 엄마의 다음 말을 기대한다는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는 딸아이와 아들은 그렇다하더라도
나라는 사람을 아내이기 이전에 여전히 여자로 봐주는 남편이 관심 없다는 듯 묵묵히 식사를 하고 있었지만
어쩌면 아이들보다 더 내 입에서 나오는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그 순간 번개처럼 스치며 지나갔다.
생각이 거기까지 닿자 괜스레 커다란 비밀 하나를 감춘 사람처럼 가슴에 뜨거운 전류가 흘러내려
짧은 순간이지만 숨소리조차 내기 힘들었다.
솔직히 누구에게나 크고 작은 비밀은 있을 것이다.
사람과 사람이 부딪히며 살아가는 세상에서 숨기고픈 작은 비밀하나 없다면 거짓말이거나
살아가는 법을 제대로 익히지 못한 사람이라고 해도 그리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자신 또렷이 떠올릴 첫사랑에 대한 기억이 없다.
내 인생에 있어서 꼭 그 부분만 지우진 것처럼...
안개처럼 떠오르는 첫사랑의 아련한 추억은 없지만 내게도 분명 첫사랑은 있었으리라.
예전이나 지금이나 사람과 사람사이에 서면 늘 내가 여자이기 이전에 사람이고 싶어했던 성격 탓에
내 자신 언제 누구에게 마음을 주었는지 분명하게 기억되지 않는다는 점만 빼면 말이다.
저녁밥을 먹고 난 후 딸아이의 집요한 물음에 이렇게 대답을 하고야 말았다.
엄마의 첫사랑도 마지막 사랑도 너희들 아빠다고...
그러자 아이들은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으로 엄마인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두 아이와 아내인 내가 주고받는 말을 듣고도 끝까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던 남편도
어쩌면 내가 한 선의의 거짓말에 마음 한구석 따스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렇지 않다고 해도 달라질 것은 아무 것도 없지만 말이다.
아무튼 내 자신도 온전히 기억하지 못하는 첫사랑에 대한 오류로부터
누구보다 빨리 빠져 나오고 싶은 사람은 분명 나였을 것이다.
처음으로 내게 결혼하고 싶다는 생각을 갖게 한 남자,
그가 내 첫사랑이든 내가 그의 첫사랑이 아니든 그건 이미 내 관심 밖의 일이 된지 오래다.
그가 나를, 내가 그를 선택한 그 순간부터 이미 지나간 과거는 추억이라는 이름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기에...
중요한 건 결혼 14년차로 살아오면서 친구처럼 때로는 연인처럼
서로에게 가장 가까이 있어 위로가 되어준 사람이 그와 나였다는 사실이다.
그런 사실은 서로가 서로를 부부라 부르며 살아가고 있는 현실만큼이나 아주 중요하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외로울 때 서로 기댈 수 있는 등이 되어 준다는 것,
그것이야말로 사랑한다는 수천수만 마디의 말보다 더 필요한 삶의 특효약은 아닐까?
사람과 사람이 만나 사랑하며 살아가는 일처럼 이 세상에 아름다운 일이 또 있을까 싶다.
세상을 밝고 아름답게 바꾸는 힘의 원천인 사랑...
인연이라 부르고 싶은 사람들과 부대끼며 살아가는 오늘, 나는 행복하다.
누구처럼 떠올릴 첫사랑에 대한 아련한 향수는 없을지라도
열린 마음으로 내어줄 어깨가 있고 기댈 등이 있으므로.
2004년 07월 - 喜也 李姬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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