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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과 느낌

나무에 얽힌 재미난 이야기 - 이희숙

by 시인촌 2004. 10. 29.

부제 - 고려 태조 왕건을 만나다

 

지난 일요일, 대구시 녹지과에서 주관한 대구 전역에 있는 오래된 나무 찾아보기 행사에 남편이 신청을 해서 우리 가족은 아침부터 부산을 떨었다. 도시락을 지참해야 한다는 연락을 받고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며 소풍준비를 했다. 물 한 통, 음료수, 과자, 과일, 그리고 찬합에 식구들이 좋아하는 반찬을 몇 가지 준비하고 나를 위해 메모지와 볼펜 한 자루를 준비하는 것을 빠트리지 않는 나를 보고 엄마는 역시~~~ 하는 딸아이의 말에 기분이 우쭐해지는 것을 가라앉히며 집을 나섰다.

 

시청 앞에 모인 사람들은 의외로 너무 적었다. 설마 이 백 오십만 대구 시민이 이런 좋은 행사에 이 정도 반응일까 싶었지만 결국 시에서 준비한 버스는 인원이 적은 관계로 다 운행하지 못하고 두 대에 나누어 타고는 그 설레는 출발을 향해 달렸다. 같은 도시에 살면서도 정말 이런 곳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도심을 조금 벗어나 외곽지로 달리니 그야말로 눈앞에 펼쳐지는 풍경이 너무도 한가롭고 평화로워 내 마음은 마냥 들뜬 아이가 되어 그 아기자기한 모습 하나라도 눈으로 담아 내지 못할까 두 눈은 참으로 열심히 스치는 창 밖 풍경을 필름처럼 담아냈다. 길옆에 수양버들이 늘어져 있는 것을 본 딸아이는 할아버지 수염 같다고 연신 신기해하고 아들은 그에 질세라 옥수수 같다라고 맞장구를 치고 미나리 밭과 공군부대를 지나자 어느 조그마한 학교 운동장에서는 어른들이 일요일 오전을 축구한다고 이리 뛰고 저리 뛰는 모습이 너무나 건강해 보여서 보는 마음 또한 기뻤다.

 

제일 먼저 우리 일행이 도착한 곳은 옻골의 비보(裨補)숲이었다. 동구 둔산동 칠계(漆溪)는 경주 최씨 집성촌으로 우리들에게는 옻골로 더 잘 알려진 마을이다. 숙종 20년(1694)에 지은 종가는 대구시에서 가장 오래된 살림집이며 종가와 사당이 대구시 민속자료 제 1호로 지정되어 있다. 느티나무로 조성된 비보 숲은 내부의 기(氣)가 밖으로 나가는 것을 막고 나쁜 기가 마을로 들어오는 것을 막기 위해 풍수지리설을 도입한 영남지방의 전형적인 양반마을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 곳에서 대구시 녹지과의 이정웅과장님(수필가)의 해박한 지식이 역사와 접목해 설명해 주실 때 그 분위기에 참가자들 모두는 압도를 당했다.

 

그 마을을 둘러싼 여러 가지 이야기 끝에 경주 최씨 종가를 대표해 마중 나오신 분의 이야기에 조금은 우리나라 문화재에 관한 보수관리가 턱없이 낮은 예산으로 인해 참으로 아쉽다는 생각을 하며 잠시 숙연한 분위기에 모두 조용해졌다. 350년 된 나무 수령을 보호수로 지정하지 않기 위해 150년으로 기록한 것이며 그 밖의 나무들도 대부분 100년 이하로 나이를 내리 깎아 놓았다. 세월이 가면 나이가 더 먹기 마련인데 여기 있는 나무들은 오히려 나이를 거꾸로 돌려 젊어지고 있다는 그 분의 말씀이 한참을 내 가슴에서 울림으로 남았다.

 

동네 안으로 들어가니 잘 정비된 기와며 담 장 사이로 가을 햇살이 감나무 위로 부서지듯 내려 안고 있었다. 오랜만에 한 낮의 기온이 덥다는 인상 마저 주는, 참으로 나들이하기에는 안성맞춤인 맑은 날씨였다. 인심 좋은 종가 댁 아낙네들이 우리 일행을 위해 음료수를 준비하고 기다리고 있었다. 역시 하는 마음과 함께 이 곳 인정을 맑은 강물과 비교해도 좋을 듯 싶다는 생각을 하며 곳곳에 묻어 있는 옛사람의 슬기로움과 지혜에 놀랄 것도 참 많은 고택을 둘러보았다. 특히 동네 어귀에 있는 나무는 고사직전에 갔다가 링겔 주사를 맞고 극적으로 살아나 올해 잎이 두 번 났다는 얘기를 들으면서 저마다 한마디씩 했다. 늙은 고목에 잎이 났다. 다시 청춘이다. 사람도 저럴 수 있을까...

 

그 곳의 아름다운 경치와 후한 인심을 뒤로하고 우리는 해방을 기념해 놓은 광복 소나무가 있는 동구 평광동으로 갔다. 이 나무는 우하정(禹夏楨)선생이 1945년 해방의 기쁨을 기념하기 위하여 심은 나무로 일명 광복소나무로 불린다. 나무가 있는 첨백당은(문화재 자료 제13호)은 조선조 말 기울어져 가는 국운을 안타까워하며 벼슬을 버리고 낙향한 우명식(禹命植)선생의 절의를 기리기 위해서 후손들이 세운 건물이었다. 당호를 첨백당이라 한 것은 우명식의 묘소가 있는 백전곡(柏田谷)을 우러러보는 집- 즉, 잣나무를 바라보는 집이라는 뜻에서 붙여진 것이다. 그 곳에서 녹지과장님의 자세한 설명과 함께 종가를 지키시는 어른의 상세한 이야기를 듣고 우리는 또 한번 사람 사는 정겨움을 맛보았다. 직접 수확한 빛깔 좋은 사과 두 상자를 준비한 그곳  분들의 정성에 감사하며 흐르는 물에 사과를 씻어서 맛있게 먹었다. 껍질을 깍지 않았지만 모두들 사 먹는 사과의 맛과는 벌써 빛과 향기부터가 다르다고 모두들 그 후한 인심에 사과 한 입 베어 물고도 처음 본 낯선 이에게 스스럼없이 말을 건 낼 수 있는 그 훈훈한 정이 가을 햇살에 마음의 주단을 깐 것 같은 부드러움을 느낄 수 있었다.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부끄러운 사춘기 소녀의 마음을 닮은 빨간 단풍이 어찌나 곱던지 앞다투어 나무 아래에서 그 어여쁜 낙엽을 하나 둘 줍느라고 남녀 구분이 없었다. 노란 은행잎은 보기만 해도 가슴 뛰는... 우수수 떨어진 은행잎을 주우면서 딸아이는 "엄마, 여기 꼭 천국 같아. 우리 이 길을 천국 가는 길이라고 하면 좋겠다." 그랬다. 그 곳은 마음의 천국이었다. 그 순간은 그랬다. 아무 잡념도 근심도 없는 오로지 가족들의 행복한 웃음만 있었다.

 

그 곳을 빠져 나와 근처 계곡에서 점심을 먹었다. 평소 공무원에 대한 느낌이 별로 호의적이지 못했던 남편은 그 날 처음으로 참다운 공무원을 본 것 같아 너무 기분이 좋다는 말을 몇 번이고 되풀이했다. 그 이유인즉, 과장님의 해박한 지식과 논리 정연한 설명, 아이들을 염려하는 그 분들의 행동 하나 하나에서 그리고 미처 점심 도시락을 준비하지 못한 사람이 혹여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비록 맞춘 김밥 도시락이었지만 여유분을 준비해서 점심 싸오지 않은 분이 있는지 배려하는... 우리는 넓은 바위 위에 준비해 온 음식들을 펼쳐 놓고 시냇물 소리 들으며 맛있는 점심을 먹었다. 식사가 끝난 후 아이들은 바위틈에 피라미라도 있을까 하는 바램으로 여기 저기 바위틈을 뒤집고 다니고 남편과 나는 먼저 놀러 온 사람들이 버려 둔 곳곳에 흩어져 있던 쓰레기를 주우면서 사람들이 놀다간 흔적이 없게 자연을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돌려주었으면 좋겠다는 바람 하나를 가슴속에 품고 말끔히 치웠다.

 

주변이 깨끗하니 흐르는 물소리까지 달라진 기분을 느끼며 우리나라 천연기념물 제 1호 측백나무 숲으로 이동을 했다. 사가 서거정(徐巨正)선생이 북벽향림(北璧香林)이란 시를 남긴 것으로 보아 수령이 약 500년 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는 설명을 들으며 바위틈과 높은 절벽에서 자라는 측백나무 숲을 보며 그 놀라운 생명력에 또 감탄을 했다. 그 때 우리 일행을 반기는 새 한 마리 날아드니 순식간에 아이들은 그 새의 날개 짓에 따라 고개가 돌아가고...... 

 

참으로 오랜만에 가을 햇살이 등위를 데우다 못해 덥다는 소리가 나올 즈음 단풍이 곱게 물든 팔공산 드라이브코스로 한바퀴 돌고 고란초 자생지인 어느 언덕에 멈추어 서서 고란초의 뒷모습을 관찰하고 그 신기함에 또 오늘 참 잘 왔다는 말이 내 입에서 절로 나왔다. 고란초는 뒷면을 자세히 관찰해보면 포자가 있다는 것을 금새 알 수 있는데 모양은 꼭 작은 벌레 알집 같고 색깔은 다갈색을 띄고 있었다. 고란초를 훼손하는 자는 일 천 만원의 벌금에 처한다는 것을 알고는 오늘 내 손이 일 천 만원을 만졌으니 먹지 않아도 배부르겠다는 어느 분의 말씀이 또 웃게 했다.

 

막바지 단풍구경을 나온 시민들로 인해 길은 너무 막혀 팔공산에서 장절공신숭겸장군유적(壯節公申崇謙將軍遺蹟)지까지 오는데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그래도 모두들 조용한, 그 분위기가 다른 어떤 행사에 참여한 모습과는 달랐다. 장절공신숭겸장군유적지에 도착한 우리는 그 곳에서 왕건을 둘러 싼 많은 이야기를 들었다. 바로 뒤에 보이는 산이 왕산인데 왜 이름이 왕산이고 하면 고려 태조가 자신의 모습과 흡사한 신숭겸장군과 옷차림을 바꾸어 그 곳에서 신숭겸장군은 견훤의 군사와 맞서 싸우다 장렬히 전사했지만 왕건은 산에서 만난 나무꾼의 도움으로 나무꾼이 준비해 온 점심을 얻어먹고 요행히 달아 날 수 있었다는 것과 나무꾼이 누구냐고 물으니 왕건이라고 해서 왕산이라 부르다가 훗날 그 곳을 왕건을 잃은 자리라고 해서 실왕(失王)이 되었다가 다시 시랑으로 된 지명이름까지 얻었다는, 참으로 많은 얘기에 역사 책 한 권을 내리 읽는 기분이 들었다.

 

어느 날 그 나무꾼이 하늘을 문득 올려다보니 반달이 떠 있어 그 이름을 반야월로 했다는 전설에서 여기라면 왕건이 적으로부터 벗어났을 거라는 안도감에 안심이라 했다는 대구 주변의 지명에 대한 얘기와 만약 그 곳에서 왕건이 견훤의 군사로부터 벗어나지 못하고 죽었다면 우리나라의 역사는 다시 써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면서 그 곳 주변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참으로 이상한 것은 왕건의 모습이 지금 한창 하고 있는 드라마의 주인공인 탤런트 최수종의 모습으로 밖에 상상할 수가 없다는 점이었다.

 

돌아오는 길은 나들이 객들로 인해 시내까지 오는데 한시간 30분이 소요됐지만 마음은 부자가 된 기분이었다. 집 앞에서 문득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가을이라 하루가 너무 짧다는 말을 실감한, 내 머리 위에는 별빛이 가득했다. 오늘 하루도 내 마음은 저 빛나는 별빛보다도 더 고운 하루였다. 나는 그 날 내가 만난 작은 행복과 인정 넘치는 사람들, 감사하는 마음을 조용히 우리 집 뜨락에 내려놓았다. 행복이라는 또 다른 이름으로......

 

 

 

2000년 11월 08일 - 喜也 李姬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