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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과 느낌

쉬어간다는 것의 의미 - 이희숙

by 시인촌 2004. 8. 11.

(부제 - 부쳐진 이름에 어울리는 역할에 충실하다는 것)


십 년만의 무더위라는 예보가 딱 맞아떨어진 올 여름, 몇 날 며칠 35도에서 물러설 기미를 보이지 않는 대구날씨에 사람 몇 모이면 인사처럼 건 내는 더워서 못 살겠다는 더위증후군이 우리 집 뜰에 내려앉아 세를 과시할 즈음 내 생각을 바꾸는 계기가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집 근처에 있는 모 초등학교 운동장이었습니다. 어느 일요일, 아침식사 후 내가 커피를 준비하는 동안 담배를 피워 물고 베란다로 나간 남편이 내 애칭인 희야를 연신 불러대 하던 일을 멈추고 남편 가까이 다가가니 남편의 시선은 학교운동장을 향하고 있었습니다. 그곳에는 지금 살고 있는 집으로 작년 봄 이사 온 이후로 몇 번의 계절을 보내고 맞이하는 동안 변함없이 만날 수 있는 풍경들과 매주 일요일이면 볼 수 있는 풍경들이 눈앞에서 한 폭의 그림처럼 어울려 있었습니다. 운동장 한가운데는 축구를 하는 사람들이 소리를 질러가면서 즐거운 땀을 흘리고 있었고 운동장 바깥쪽에는 더운 날씨 탓인지 이른 새벽 운동하러 나온 사람들 수만큼이나 많은 사람들이 학교 운동장을 찾아와 나름의 시간을 즐기고 있었습니다. 큰 나무 사이사이로 산책을 즐기는 사람들, 운동장 바깥쪽을 빙 돌아가며 놓여진 긴 의자에 앉아 옆 사람과 도란도란 이야기 나누는 사람들, 긴 의자 뒤로 자전거 타는 아이들과 겨울이면 연날리기에 한창 신이 났을 아이들이 여름임을 확연히 느끼게 하는 곤충 채집 망을 들고 나무와 나무 사이를 부지런히 옮겨 다니며 더운 여름날씨를 즐기는 모습을 보면서 사람들에게 많은 이야기와 추억을 제공해주는 운동장이 심장이 살아 펄펄 뛰는 사람처럼 예뻐 보이기까지 했습니다.

 

"이 학교 운동장만큼 제 구실을 확실히 하는 운동장도 드물 거야."
"그렇지. 운동장이라는 이름에 어울리는 역할을 확실히 하고 있는걸 보면 참 행복한 운동장이라는 생각이 들어."
"행복한 운동장, 말되네."
그 날 이후부터 내가 날마다 바라보며 무언의 대화를 나누는 ‘행복운동장’은 단순한 운동장으로서의 기능을 뛰어넘은 생명이 살아 숨쉬는 쉼터 같은 곳으로 가슴에 새겨졌습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바람 불어도 찾아와 주는 많은 사람들로 인해 운동장이란 이름에 가장 잘 어울리는 역할을 훌륭히 해내고 있는 행복운동장을 지켜보는 것은 마음 맞는 사람과 차 한잔 마시며 대화를 나누는 것처럼 기분 좋은 일이며 삶의 질을 저울질하지 않고 누구에게나 열려있는 운동장의 작은 변화를 지켜보는 일은 그곳을 찾는 사람들만큼이나 내게 있어서도 일상 중 놓칠 수 없는 소중한 시간이 되고 있습니다.  


그 날도 여느 날과 마찬가지로 대구의 기온은 섭씨 35도를 오르내리는 날 중 하루였지요. 평소 바깥음식을 싫어하는 남편은 그날도 다른 날과 마찬가지로 점심식사를 하러 집으로 왔어요. 점심을 먹으러 온 남편, 식사 후 커피를 마시고도 좀체 일어설 생각은커녕 에어컨을 틀어놓고 위통을 드러낸 채 거실 바닥에 벌러덩 드러눕더군요. "희야, 자자..." 하면서 말이죠. 더위에 오죽하랴 싶어 모른 척 했지만 찬물에 샤워를 하고도 시원한 음료나 아이스크림을 찾아 냉장고 문이 몸살을 앓을 정도로 두 꼬마의 냉장고 애정표현이 날이 갈수록 더하는 걸 보고서야 뭔가 대책을 세워야지 이러다간 귀중한 시간을 무의미하게 보낼 수밖에 없겠다는 생각이 불현듯 밀려들더라고요. 생각이 거기까지 닿자 내 마음은 바빠지기 시작했어요. 신문을 보거나 텔레비전 뉴스를 봐도 뭐 하나 시원한 꺼리는 없고 나라 안 밖으로 사건사고만 무성한 시간 속에서 어떻게 이 여름을 잘 보낼 수 있을까 하는 생각 때문이었지요.

 

생각 끝에 내린 결론이 내 자신에게 특명을 부여하기로 했어요. 특명이라고 말하고 보니 너무 거창한 것 같지만 더운 날씨 덥다고 소극적인 자세를 취할 것이 아니라 여름을 가족과 더불어 즐길 수 있는 재미있는 꺼리를 만들어라. 이름하여‘더위를 접수하라’였어요. 생각과 함께 행동은 곧 바로 실천으로 옮겨졌지요. 그 첫 번째 조치로 저 혼자만의 시간을 줄이고 줄인 시간만큼 가족과 함께 즐길 것이었는데 생각을 행동으로 실천하기 위해서는 가능한 웹 상에서 멀어지거나 사라지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더위를 접수하는 것과 웹 상에서 사라지는 것은 별 상관없을 것처럼 보이지만 그렇지가 않았어요. 혼자만의 세계를 즐기던 시간을 고스란히 가족에게 돌려주기로 결정하고 나니 내 생활은 그 이전보다 더 성숙한 즐거운 변화를 경험하는 기회가 되었어요. 그날 이후 내 시간은 철저하게 가족중심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여기저기 가고 싶은 곳과 하고 싶은 것, 먹고 싶은 것을 찾아 함께 행동하게 된...

 
스스로 닫아 둔 문은 언젠가 열린다는 말이 있지만 살면서 ‘쉬어간다는 것의 의미’는 길든 짧든 아주 중요하다는 것을 이번 여름 스스로에게 부여한 특명을 통해 직접 체험했습니다. 느낀 것을 말하는 것 이상으로 말이죠. 쉬어간다는 것은 그 동안 누리고 지켜온 것들로부터의 단절이나 분리가 아니라 새로운 에너지를 얻는 의미 있는 시간이었기에 아름다운 성장을 위한 재투자의 시간이라고 스스럼없이 말하고 싶습니다.

 
피고 지는 꽃잎이 한순간 졌다해서 그 뿌리마저 사라지는 게 아니듯 쉬는 동안 글쓰는 사람으로서의 내 이름은 문득 문득 잊혀졌지만 이번 여름만큼 내게 주어진 가족, 어머니, 아내라는 이름에 가장 잘 어울리는 위치에 있었던 적도 드물었던 것 같습니다. 어쩌면 나는 쉬어 가는 동안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가슴으로 느낀 것을 글로서 기록하지 않았을 뿐, 그 어느 때보다 더 많이 더 깊이 가슴으로 글을 썼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우리는 종종 앞만 보고 달려 온 스스로를 어느 지점에서는 내려놓을 줄도 알아야 합니다. 내려놓은 자신을 적정거리에서 말없이 바라볼 줄도 알아야 하고 가만히 감싸안을 줄도 알아야 합니다. 여름이 춤추는 길목마다 더위에 지치고 후진하는 경제에 철퍼덕 주저앉은 사람들이 풍요 속 빈곤을 온몸으로 겪고 있는 동안 ‘더위를 접수하라 ’라는 내 자신에게 내린 특명에 충실하기 위해 나보다는 함께 라는 이름을 선택한 내 결정은 탁월했습니다.

 
누군가에게 있어서 의미 있는 존재로 남는다는 것과 스스로에게 부쳐진 이름에 어울리는 역할에 충실하다는 것은 늘 변함없이 찾아와 주는 사람들이 있어 행복한 운동장처럼 조건 없는 사랑을 내어주는 일임을 알게 되었으므로 열대야로 밤잠을 설쳐야하는 무더운 여름날도 결코 힘들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열정적인 여름을 내 것으로 만들 수 있었음에 참으로 행복한 나날들이었습니다.

 

 


2004년 08월 - 喜也 李姬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