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제 - 고려 태조 왕건을 만나다
지난 일요일, 남편이 대구시 녹지과에서 주관한 대구 전역에 있는 오래된 나무 찾아보기 행사에 신청을 해서 우리 가족은 아침부터 나들이 준비에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며 소풍준비를 했다. 찬합에 김밥과 식구들이 좋아하는 반찬 몇 가지와 물, 음료수, 과자, 과일을 준비하고 또 나를 위해 메모지와 볼펜 한 자루를 챙겼다. 그 모습을 본 딸아이 "엄마는 역시 멋져" 하고 엄지 손가락을 치켜세운다.
시청 앞에 모인 사람들은 의외로 너무 적었다. 설마 이백 오십만 대구 시민이 이런 좋은 행사에 이 정도 반응일까 싶었지만 결국 시에서 준비한 버스는 인원이 적은 관계로 다 운행하지 못하고 두 대에 나누어 탔다. 도심을 조금 벗어나 외곽지로 달리니 눈앞에 펼쳐지는 풍경이 너무도 한가롭고 평화로워 오길 참 잘했다 싶었다. 얼마쯤 더 달리니 길가에 수양버들이 양 옆으로 길게 늘어져 있다. 그 모습을 본 딸아이는 할아버지 수염 같다며 마냥 신기해하고 아들은 그에 질세라 옥수수 같다고 맞장구를 친다. 같은 대구지만 처음 가 보는 곳이라 그런지 미나리 밭도 공군부대도 학교 운동장에서 어른들이 축구하는 모습도 신선하게 다가왔다.
제일 먼저 우리 일행이 도착한 곳은 옻골의 비보(裨補) 숲이었다. 동구 둔산동 칠계(漆溪)는 경주 최 씨 집성촌으로 옻골로 더 잘 알려진 마을이다. 숙종 20년(1694)에 지은 종가는 대구시에서 가장 오래된 살림집이며 종가와 사당이 대구시 민속자료 제1호로 지정되어 있다. 느티나무로 조성된 비보 숲은 내부의 기(氣)가 밖으로 나가는 것을 막고 나쁜 기가 마을로 들어오는 것을 막기 위해 풍수지리설을 도입한 영남지방의 전형적인 양반마을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곳에서 대구시 녹지과 이정웅 과장님(수필가)의 해박한 지식이 역사와 접목해 설명해 주실 때 참가자들 모두는 그 분위기에 압도 당했다.
마을을 둘러싼 여러 가지 이야기 끝에 경주 최 씨 종가를 대표해 마중 나오신 분께서 우리나라 문화재에 관한 보수관리가 턱없이 낮은 예산으로 인해 참으로 아쉽다는 말씀을 하셨다. 350년 된 나무 수령을 보호수로 지정하지 않기 위해 150년으로 기록한 것이며 그 밖의 나무들도 대부분 100년 이하로 나이를 내리 깎아 놓았다고 했다. 세월이 가면 나이가 더 먹기 마련인데 여기 있는 나무들은 오히려 나이를 거꾸로 돌려 젊어지고 있다는 말씀에 놀라고 안타까움에 저마다 한 마디씩 거들었다.
동네 안으로 들어가니 잘 정비된 기와, 담장, 가을 햇살에 익어가는 감나무가 먼저 반긴다. 참으로 나들이하기에는 안성맞춤인 맑은 날씨다. 인심 좋은 종가 댁 아낙네들이 우리 일행을 위해 음료수를 준비하고 기다리고 있었다. 고택마루에 앉아 잠시 쉬는 동안 종갓집이었던 친정집 마루가 생각나고 손님이 오면 마음을 다해 대접하셨던 엄마가 생각났다. 옻골을 나오기 전, 동네 어귀에 있는 나무는 고사직전에 갔다가 링거 주사를 맞고 극적으로 살아나 올해 잎이 두 번 났다는 얘기를 들었다. 늙은 고목에 잎이 났다. 다시 청춘이다. 사람도 저럴 수 있을까... 를 생각했다.
옻골에서 나와 해방을 기념해 놓은 광복 소나무가 있는 동구 평광동으로 갔다. 이 나무는 우하정(禹夏楨) 선생이 1945년 해방의 기쁨을 기념하기 위하여 심은 나무로 일명 광복소나무로 불린다. 나무가 있는 첨백당은(문화재 자료 제13호)은 조선조 말 기울어져 가는 국운을 안타까워하며 벼슬을 버리고 낙향한 우명식(禹命植) 선생의 절의를 기리기 위해서 후손들이 세운 건물이다. 당호를 첨백당이라 한 것은 우명식의 묘소가 있는 백전곡(柏田谷)을 우러러보는 집- 즉, 잣나무를 바라보는 집이라는 뜻에서 붙여진 것이다. 그곳에서 녹지과장님의 자세한 설명과 함께 종가를 지키시는 어른의 상세한 이야기를 듣고 우리는 또 한 번 사람 사는 정겨움을 맛보았다. 직접 수확한 빛깔 좋은 사과 두 상자를 준비한 그곳 분들의 정성에 감사하며 흐르는 물에 사과를 씻어서 맛있게 먹었다. 껍질을 깍지 않았지만 모두들 사 먹는 사과의 맛과는 빛깔과 향기부터가 다르다고 입을 모았다.
빨갛고 노란 단풍이 어찌나 곱던지 어른아이 할 것 없이 감탄사를 부르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우수수 떨어진 노란 은행잎을 조그마한 손으로 한 장 한 장 소중하게 줍던 딸아이 "엄마, 여기 꼭 천국 같아. 우리 이 길을 천국 가는 길이라고 하면 좋겠다." 믿는 종교가 없으니 천국이라는 말을 입에 올릴 일도 없지만 그 순간만은 딸아이 말대로 천국 같았다. 가족들의 행복한 웃음이 들리고 예쁘고 아름다운 단풍잎이 가득한 길을 행복한 마음으로 걷고 맛있는 사과로 입도 즐거워니 이 보다 더한 천국이 있을까 싶었다.
근처 계곡에서 점심을 먹었다. 평소 공무원에 대한 느낌이 별로 호의적이지 못했던 남편은 그날 처음으로 참다운 공무원을 본 것 같아 너무 기분이 좋다는 말을 했다. 그 이유인즉, 과장님의 해박한 지식과 논리 정연한 설명, 아이들을 염려하는 말과 행동 그리고 점심 도시락을 준비하지 못한 사람이 혹여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여유분을 준비해서 배려하는 모습... 우리 가족은 넓은 바위 위에 준비해 온 음식들을 펼쳐 놓고 시냇물 소리 들으며 맛있는 점심을 먹었다. 식사가 끝난 후 아이들은 작은 물고기가 있을지도 모른다며 바위틈을 뒤집고 다니고 남편과 나는 먼저 놀러 온 사람들이 버린 쓰레기를 주웠다.
주변이 깨끗하니 흐르는 물소리까지 달라진 듯한 기분을 느끼며 우리나라 천연기념물 제1호 측백나무 숲으로 이동을 했다. 사가 서거정(徐巨正) 선생이 북벽향림(北璧香林)이란 시를 남긴 것으로 보아 수령이 약 500년 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는 설명을 들으며 바위틈과 높은 절벽에서 자라는 측백나무 숲을 보며 그 놀라운 생명력에 감탄을 했다.
단풍이 곱게 물든 팔공산 드라이브코스로 한 바퀴 돌고 고란초 자생지인 어느 언덕에 멈추어 서서 고란초의 뒷모습을 관찰하고 그 신기함에 오늘 참 잘 왔다는 말이 절로 나왔다. 고란초는 뒷면을 자세히 관찰해 보면 포자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모양은 꼭 작은 벌레 알집 같고 색깔은 다갈색을 띠고 있었다. 고란초를 훼손하는 자는 일천만 원의 벌금에 처한다는 것을 알고는 오늘 내 손이 일천만 원을 만졌으니 먹지 않아도 배부르겠다는 어느 분의 말씀에 다들 큰소리로 웃었다.
막바지 단풍구경을 나온 시민들로 인해 길은 너무 막혀 팔공산에서 장절공신숭겸장군유적(壯節公申崇謙將軍遺蹟)지까지 오는데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그래도 모두들 조용한 가운데 분위기가 다른 어떤 행사에 참여한 모습과는 달랐다. 장절공신숭겸장군유적지에 도착한 우리는 그곳에서 왕건을 둘러싼 많은 이야기를 들었다. 바로 뒤에 보이는 산이 왕산인데 왜 이름이 왕산이고 하면 고려 태조가 자신의 모습과 흡사한 신숭겸장군과 옷차림을 바꾸어 그곳에서 신숭겸장군은 견훤의 군사와 맞서 싸우다 장렬히 전사했지만 왕건은 산에서 만난 나무꾼의 도움으로 나무꾼이 준비해 온 점심을 얻어먹고 요행히 달아 날 수 있었다는 것과 나무꾼이 누구냐고 물으니 왕건이라고 해서 왕산이라 부르다가 훗날 그곳을 왕건을 잃은 자리라고 해서 실왕이 되었다가 다시 시랑으로 된 지명이름까지 얻었다는, 참으로 많은 얘기에 역사책 한 권을 내리읽는 기분이 들었다.
어느 날 그 나무꾼이 하늘을 문득 올려다보니 반달이 떠 있어 그 이름을 반야월로 했다는 전설에서 여기라면 왕건이 적으로부터 벗어났을 거라는 안도감에 안심이라 했다는 대구 주변의 지명에 대한 얘기와 만약 왕건이 견훤의 군사로부터 벗어나지 못하고 죽었다면 우리나라의 역사는 다시 써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면서 주변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참으로 이상한 것은 왕건의 모습이 지금 한창 하고 있는 드라마의 주인공인 탤런트 최수종의 모습으로 밖에 상상할 수가 없다는 점이었다.
돌아오는 길은 나들이 객들로 인해 시내까지 오는데 한 시간 30분이 소요됐지만 마음은 부자가 된 기분이었다. 가을이라 하루가 너무 짧다는 말을 실감한 날, 내가 만난 잔잔한 행복과 인정 넘치는 사람들, 감사하는 마음을 조용히 우리 집 뜨락에 내려놓았다. 행복이라는 또 다른 이름으로......
2000년 11월 08일 - 喜也 李姬淑
'생각과 느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어떤 하루(부제 - 겨울에 만난 오페라 춘희) - 이희숙 (0) | 2004.12.10 |
---|---|
일탈을 꿈꾸는 여자 - 이희숙 (0) | 2004.11.15 |
우연히 찾아든 행운처럼 다시 한번 껴안고싶다 - 이희숙 (0) | 2004.10.15 |
떠올릴 첫사랑에 대한 아련한 향수는 없을지라도 - 이희숙 (0) | 2004.09.03 |
쉬어간다는 것의 의미 - 이희숙 (0) | 2004.08.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