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의 첫 주말 토요일 오후, 대구 경제 살리기 일환으로 S 기업에 대한 불매운동이 대대적으로 벌어지기 전까지 자주 들렀던 S할인점에 참으로 오랜만에 가족과 함께 갔다. 한달 동안 그 운동에 동참한다는 뜻으로 나 역시 다른 할인점으로 바꾸어 반찬거리며 생필품을 사러 다녔는데 한달이 지난 오늘은 다른 곳에서는 S할인점만큼 쇼핑 기분을 충족시키지 못한다는 내 나름의 평가와 불편함 때문에 여전히 불매운동이 벌어지고 있는 상황인데도 그곳에 들렀다. 오랜만에 들른 그곳풍경은 불매운동에 동참한 시민들 때문인지 여느 때의 복잡함을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어 오히려 낯설기까지 했지만 소비자 입장인 나로서는 조용한 가운데 서비스 질까지 향상된 느낌을 곳곳에서 직접 만날 수 있어 만족할만한 쇼핑을 할 수 있어 무엇보다 좋았다.
코너마다 사람의 발길은 드물었지만 그런 와중에도 유독 사람들이 많이 몰리는 공간이 눈에 띄었는데 그곳은 다름 아닌 크리스마스용품으로 꾸며 놓은 가게였다. 비록 살 계획도 없고 실제로 사지도 않지만 나이를 불문하고 다양한 크기의 크리스마스트리, 색색의 반짝이와 구슬모양의 전구, 선물꾸러미 상자, 지팡이, 산타할아버지, 선물을 넣을 수 있는 양말모양의 신발, 금방이라도 손으로 가볍게 건드리기만 해도 그 소리가 온 세상을 다 평화롭게 울릴 것 같은 은종 등 가지각색인 크리스마스장식품 앞에서 신기한 듯 바라보고 있는 사람들을 구경하자니 사람은 나이를 먹어도 순수한 동화 같은 세계 하나씩은 저마다 가슴 어딘가에 품고 산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생각을 하니 내 주변에서 색색의 크리스마스용품들을 구경하는 사람들이 마치 오래 전부터 알고 지내온 지기처럼 편안하고 정겹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크리스마스장식품과 그 주변을 둘러싼 사람들을 구경하다가 문득 아들 녀석이 태어난 해에 산 오래된 우리집 크리스마스 트리가 생각이 났다. 해마다 장식품을 조금씩 바꾸어 변화를 주어 달아도 특별히 새롭다는 느낌을 받지 못해 기회가 되면 큰 크리스마스트리로 바꾸어야지 하는 생각을 하고 있던...
좀 이른 감은 없지 않았지만 옆에서 함께 쇼핑을 하고 있던 남편의 팔을 잡아당기며 "나, 저기 큰 크리스마스트리 갖고 싶은데 지금 사 가지고 가면 안될까?"하고 특유의 애교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내 말이 떨어지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남편은 흔쾌히 마음에 드는 크기로 고르라며 나보다 서 너 발자국 앞서 크리스마스트리가 진열된 곳으로 가더니 "희야, 이거 어때?" 하고 내 의견을 묻는다. 남편과 내가 크리스마스트리를 고르는 동안 아이들은 마음에 드는 장식용품을 고르느라 즐거워하며
"엄마 이건 어때? 예쁘지?"
"아빠, 이걸로 고를까?"
두 아이의 재잘거림이 이른 봄날 시냇물소리처럼 마음을 설레게 하는 동안 가족만장일치로 트리 하나와 장식품 몇 종류를 골랐다.
집으로 돌아온 후 두 아이는 새로 산 탱탱 볼을 서로 먼저 하겠다고 가벼운 입씨름을 하고 남편은 주차장에 차를 세워두고 사온 물건들을 집안으로 들여놓기가 바쁘고 나는 남편이 들여다 준 제법 많은 종류의 물건들을 분류해서 냉장고와 싱크대, 욕실 등 제자리를 찾아 정리하기에 바빴다. 그런 도중에 오늘 저녁 음악회에 함께 가기로 한 친구한테서 내 휴대전화로 전화가 왔다. 앞산에 있는 대덕문화전당에서 하는 가곡과 포크송의 만남이라는 주제로 열리는 공연 보러가지 말고 문화예술회관에서 공연하는 오페라 ‘춘희’를 보러가자고, 흔쾌히 그렇게 하자며 만날 장소와 시간을 정하고 전화를 끊었다.
할인점에서 쇼핑을 끝내고 이른 저녁을 먹었지만 시간이 너무 이른 탓에 밥을 전기 압력밥솥에 올려놓고도 혼자 나들이 가는 것이 못내 미안해진 나는 작은 목소리로 찌개랑 반찬 있으니까 배고프면 챙겨먹으라고 남편에게 부탁을 하고 집을 나섰다. 사실, 오페라 춘희는 전에도 본적이 있지만 이른 저녁 나 자신을 위해 투자할 수 있는 시간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진 나는 다소 쌀쌀한 밤 공기마저 상쾌하다 느끼며 약속장소인 문화예술회관으로 갔다. 오페라가 주는 묘미에 잔뜩 기대를 하고...
La Traviata(춘희)는 세계적으로 널리 상연되고 있는 이 작품의 원작은 '암굴왕', '몬테크리스토백작'의 저자인 알랙산더 듀마의 아들(ALEXANDER DUMAS FILS)이 통렬하게 사회 비평을 하여 1848년 발표되자마자 많은 반응을 불러일으킨 (춘희 - LA DAME AUX CAMELIAS)이다. 1852년 베르디가 파리를 방문했을 때 '춘희'를 희곡으로 개작한 연극을 보고 오페라를 만들어야겠다는 창작의욕이 샘솟아 '리골렛토'의 대본을 쓴 프란체스코 M.파아배에게 오페라 대본을 의뢰하여 다음해 1월에 완성했는데 내용을 간략하게 소개하자면 대략적으로 아래와 같다.
파리 사교계의 여왕인 비올레타의 집에서 열리는 파티에서 알프레도는 그녀를 만나 사랑하게 된다. 그러나 그녀는 폐병을 앓는 몸이고, 순간적인 향락에만 도취하기 때문에 그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지만 그녀도 마음속으로 그를 사랑한다. 두 사람은 드디어 교외에서 달콤한 사랑의 보금자리를 만든다. 그러나 돈 때문에 집을 비운 사이에 그의 아버지인 제르몽이 나타나 알프레도를 단념해 달라고 부탁한다. 그녀는 그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마음에서 파리로 돌아와 버리지만 알프레도는 그녀가 돈에 끌려서 자기를 버렸다고 생각한다.
“춘희(LA TRAVIATA)”는 '축배의 노래'와 합창 그리고 비올레타가 알프레도를 그리며 부르는 '아! 그이였던가'등에서 느낄 수 있듯이 다시없이 화려하고 아름다운 선율에 넘쳐흐르고 있다. 제3막으로 되어 있는 이 오페라를 보면서 진정한 사랑이란 무엇인가? 라는 물음 앞에서 내 마음을 걸어 두었다. 한 남자를 진정으로 사랑했던 한 여인이 흰색가운을 걸치고 흰색침대보가 무색할 정도의 창백한 안색으로 창문을 열어 달라고 절규할 때 그녀의 침대 머리맡에 있던 둥근 테이블 위 두개의 촛불 속에서 빨간 심장 같은 그녀의 사랑을 닮은 열정을 그 순간 나는 보았다. 그것이 비록 내 지나친 감상이었다 해도 그 순간 내 자신이 오페라 속 그녀가 된 듯 너무 가슴이 아파 숨소리조차 낼 수 없었다.
지난 10월, 야외 공연장에서 보았던 오페라 '아이다' 와는 그 규모나 성격이 아주 달랐지만 실내라는 한정된 공간이 주는 또 다른 매력, 웅장한 오케스트라 없이 스피커 음을 타고 들려오는 그 분위기마저도 좋았다. 춘희 공연이 끝날 때까지 출연진들의 높은 음색과 간간이 찢어질 듯 이어지는 가파른 숨소리, 지휘자의 부드러운 손놀림과 피아노 연주... 웅장함은 다소 뒤떨어졌지만 춥지 않은 공간에서 편하게 감상할 수 있었기에 공연이 끝나고 친구랑 쌀쌀한 야외에서 차 한잔을 마시는 동안에도 나는 그 여운에서 쉬 빠져 나올 수가 없었다.
한 남자의 오해에서 비롯되어지는 사랑의 갈등 그리고 뒤늦은 후회와 함께 돌아온 사랑... 오페라 ‘춘희’를 보면서 진정으로 그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를 느끼며 또한 진정한 사랑은 어떤 사랑이며 주는 사랑과 받는 사랑의 함수관계는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에 대한 생각을 헤아리며 집으로 들어서는데 거실 한켠에 자리잡은 크리스마스트리에서 나오는 휘황찬란한 불빛과 음악이 내 눈과 귀를 먼저 반긴다. 외출해서 입은 옷을 갈아입을 사이도 없이 내 곁으로 쪼르르 달려오는 두 아이는 아빠가 해주신 라볶이까지 먹었다고 자랑하며 공연을 보고 돌아오는 엄마를 깜짝 놀라게 해주려고 아빠와 함께 즐겁게 크리스마스트리를 장식했다며 내 반응을 살핀다.
작지만 이렇게 서로에게 사랑을 주고받고 확인하며 사는 것,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사랑의 출발점이 아닐까?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작은 배려에서부터 시작되는 사랑... 그 사랑으로 인해 오늘도 나는 내가 존재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너무도 감사할 것이 많은 내 삶의 노트에 오늘도 맑음, 행복지수 무한대, 감동 지수 100%라고 정성을 다해 따스함을 새겨 넣었다.
2000년 12월 02일 - 喜也 李姬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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