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 3시 40분 경 우리 집 전화벨이 요란하게 울렸습니다. 따르릉~~~ 하던 일을 멈추고 수화기를 들었더니 남편이 다짜고짜 오늘(9월 29일) 달구벌축제에 요즘 인기 최고를 달리는 가수들의 축하공연이 있으니 딸아이와 함께 놀러가라는 것이었습니다. 작년에 있었던 축제행사에 가족 모두가 함께 갔다가 힘들었던 일을 기억하는 남편이 아들 녀석은 자기가 놀아주고 저녁도 알아서 챙겨 먹일 테니까 걱정말고 분위기 좋아하는 두 모녀가 나들이 겸 다녀오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나는 O.K 사인을 보내고 딸아이가 학원에서 오기만을 기다렸습니다.
초등학교 2학년인 딸아이가 좋아하는 가수들 이름을 줄줄 외우고 신세대 가수들이 그야말로 딱 이라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최신곡을 좋아하고 가끔은 아이들과 볼륨을 최대한 높여서 댄스파티를 집에서 열기도 하는 내게 가수들의 축하공연에 딸아이와 함께 놀러가라는 남편의 전화는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오후 5시 50분쯤 딸아이와 나는 한껏 멋을 부리고 상쾌한 기분으로 집을 나섰습니다. 저녁에 추울지도 모르니 겉옷을 하나 더 입는 게 좋을 것 같다는 남편의 관심을 기쁜 마음으로 접수하고 가을 속으로 걸어 들어갔습니다. 행사장에 도착하니 벌써 많은 인파(족히 몇 천명은 충분히 되고도 남는)에 숨이 막힐 지경이었지만 딸아이의 재치로 우린 용케도 중간 두 번째 줄에 자리를 잡고 앉았습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요? 공연이 시작됨을 알리는 불꽃이 하늘로 치솟고 사람들은 일제히 그 아름다움에 환호성을 지르고 모두 한마음이 되어 즐거워했습니다. 이윽고 누구나 이름만대면 다 아는 이상벽씨가 진행을 맡았습니다. 물론 어여쁜 여자 진행자와 함께 말이죠. 대구 야외 음악당 개장 축하 쇼는 시작은 그럴 듯 하게 좋았지만 대구와 자매결연을 맺고 있는 중국, 일본 ,러시아 등지에서 온 도시의 대표자가 나와 축하 메시지와 함께 선보인 특별 공연이 이어지고 대구시장인 문희갑 시장을 비롯한 여러 분야에 계신 인사들의 축하 메시지가 길어지자 순식간에 장내는 술렁이기 시작했습니다. 곳곳에서 들려오는 웅성거림, 빨리 끝내고 가수들의 공연을 시작하라는 야유 섞인 비난... 아이에게 결코 보여주고 싶지 않은 광경들이 점점 더 커져만가 그 순간 내 자신이 그곳에 있다는 사실이 무척 부끄러웠습니다.
가수들의 공연이 시작되자 그나마 자리를 지키고 있던 많은 사람들까지 서로 가까이에서 보겠다고 일제히 일어서고 밀고 당기고 여기저기서 욕설이 난무하는 그야말로 무질서의 진수를 보여주는 상황이 순식간에 일어났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그곳을 빠져나가기 전까지 혹여 내 어린 딸아이가 다칠세라 한껏 긴장을 하고 여차하면 내 몸으로 막아줄 기세로 마음의 각오를 단단히 하는 것뿐이었습니다. 여자는 약하지만 엄마는 강하다는 말이 있듯이 그 순간 나는 여자이기를 포기하고 오로지 엄마로서만 존재하는 듯 남아있는 힘을 다 모아서 아이를 보호했지만 억센 남자들과 몸집 좋은 사람들에 밀려 파도타기 하는 사람처럼 덩달아 이리저리 움직이는 꼴이 되었습니다. 밀고 당기는 답답한 상황 속에서도 아이는 침착함을 잃지 않고 "엄마, 괜찮아?" 하면서 오히려 나를 걱정해주어 어른답지 못한 몇 몇 사람들의 행동을 보고 어떤 생각을 할까 은근히 걱정하던 내 마음을 말끔히 씻어 주었습니다.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그 곳의 분위기는 더 아우성이었습니다. 무슨 사고라도 날것에 대비해 곳곳에 배치해 있던 경찰 아저씨들의 노고에도 아랑곳 않는 모습들이 나이와 성별을 막론하고 벌어져 결국 ‘이정현’과 ‘백지영’의 노래를 들은 걸로 만족하고 노래가 한참 열기를 더하는 중간에 그곳을 빠져 나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딸아이가 오지 않은 동생에게 조성모 사인을 받아주겠다고 메모장까지 준비해 왔지만 안전을 생각해 나가자는 엄마인 내 말에 순순히 긍정적인 대답(조성모 공연은 보지 않아도 된다는...)을 해 우리 모녀는 미련 없이 그 자리를 나올 수 있었습니다.
공연장 밖 곳곳에도 많은 인파로 발 디딜 틈조차 없을 정도로 북적댔지만 우리가 찾아간 퀼트 전시장은 다소 한산해 다행히 편안한 마음으로 구경할 수가 있었습니다. 퀼트 전시장을 빠져 나오자마자 배고프다는 아이를 데리고 맛있게 저녁을 먹은 후 나는 커피, 아이는 음료수로 후식까지 해결한 후 참으로 많은 것들이 우리의 시선을 머물게 하는 길 위를 걸었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본 가로수와 벤치, 오색 색깔의 풍선, 솜사탕... 어느 것 하나 정답지 않은 것이 없었습니다. 행사장과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집으로 걸어서 돌아오는 길은 운동회 끝마치고 학원까지 다녀온 아이가 피곤할까 염려되어 세 번이나 쉬면서 느린 발걸음에 맞춰 도란도란 이야기 나누며 걷다보니 집까지 도착하는데 평소보다 두 배 이상 많은 시간을 필요로 했지만 어린 딸과의 데이트는 참으로 가슴 뿌듯한 행복한 시간이었습니다.
아이와 나누었던 많은 말 중에서 느닷없이 질문한
"엄마를 어떻게 생각해?"
아이는 마치 정답을 미리 준비한 듯 아니면 내가 물을 걸 알기라도 한 듯
한 치의 주저함 없이 대답을 했습니다.
"엄마는 착하고 예뻐, 우리 마음도 잘 알아, 우리가 좋아하는 노래도 잘 부르고..."
순간 내 마음은 천사의 날개를 선물 받은 사람처럼 행복한 기분에 들떠
아이를 내 품에 꼭 껴안고
"엄마도 그래, 이 세상에서 너희들이 제일 곱고 예뻐, 엄마 눈에는 네가 가장 사랑스러워..."
아이의 볼도 비비고 등도 쓸어주면서 두 손 꼭 잡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발걸음마저 가벼워 피곤하다는 생각조차 들지 않았습니다.
비록 딸아이와 아들 녀석이 좋아하는 ‘조성모’ 사인은 받지 못했지만
참으로 오래 기억될 행복한 마음을 담고 왔습니다.
산다는 것은 이런 작은 것에서 더 큰 힘을 얻고
자신의 존재에 대한 감사를 하게 되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을 끝으로
하루의 작은 창을 닫을까 합니다.
2000년 09월 29일 - 喜也 李姬淑
'사과향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도전해 볼 가치는 있다고 봐.(I'm sure it's worth trying.) - 이희숙 (0) | 2005.09.05 |
---|---|
곰을 닮은 강아지 곰지 이야기 - 이희숙 (0) | 2005.08.08 |
솔직히 너도 가끔은 쉬고 싶잖아. (0) | 2005.07.19 |
비가 내리니까 별게 다 생각이 난다 - 이희숙 (0) | 2005.07.12 |
슬픔과 기쁨 교차로에서 톡 쏘는 콜라 같은 여자를 만나다 - 이희숙 (0) | 2005.06.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