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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과 느낌

그냥 그렇게 담백한 수묵화처럼 - 이희숙

by 시인촌 2004. 1. 25.

 

가끔은 아무 이유 없이 심심한 날이 있다.

딱히 하고 싶은 것도 없고 TV도 음악도 별로 마음에 들어오지 않는 날 말이다.

그런 날이 일 년 중 몇 번 찾아드는지 알 수 없으나 아무튼 어제는 그런 날이었다.

내 표정이 그냥 넘기기에는 아니다 싶었는지 남편이 다가와 말을 건다.

 "무슨 일 있어?"

"일은 무슨, 그냥."

 

살면서 무심코 내뱉는 말 중에 너, 나 할 것 없이 그냥이라는 말을 자주 한다.

누군가 무슨 말을 물었을 때 달리 표현할 말이 얼른 생각나지 않을 때 무마용으로 사용하기도 하고

정말 그냥이라는 말 밖에는 달리 설명할 마땅한 언어를 찾지 못해서이기도 하지만

그냥이라는 말의 의미를 잘 살펴보면 단순함 그 이상의 의미로까지 확대될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사랑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왜 하필 그 사람이 아니면 안 되는데 혹은 어디가 그렇게 좋아서 사랑을 느끼는 건데 라고 그 누군가 물으면

대부분 사람은 어디가 좋고 어떤 면에서 끌림을 느낀다고 조목조목 나열해서 말하기보다

그냥 다 좋아라고 말하는 이가 참으로 많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냥은 단순하면서도 담백한 것,

그냥이라는 말은 때때로 욕심 없는 마음과 순수한 마음을 표현하는데 어울리기도 하지만

그냥이라는 말은 그 이상의 범위까지도 허용한다.

예를 들어서 그냥 좋은 것은 마냥 좋은 것이 될 수도 있고 더 나아가서 이유 없이 좋은 것 그래서 조건을 따질 필요가 없는,

살면서 가끔은 특별한 부연 설명을 하지 않아도 그냥이라는 말로도 충분히 그 느낌을 전달할 수도 있다.

 

 

♣ 옥상에 오래도록 서서 멀리 눈을 들어 앞산을 바라보다가 서산마루에 걸린 노을에 내 마음을 걸어두고

어젯밤 어느 한순간 내 마음을 흔들어 놓았던 허한 마음의 정체를 정직하게 느껴보려 애를 썼다.

허한 마음의 정체가 되돌릴 수 없는 욕심 때문이었음을 알아차리는데 그리 긴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이 여름날 내 기억 속에 남아 있는 또렷한 그리움과 희미한 그리움의 정체,

그것은 어린 시절 미루나무에 걸터앉아 쉬고 있는 매미를 잡아 말없이 건 내준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요,

사춘기시절 공부를 하다말고 무슨 할 말이 그리도 많던지 연습장에 낙서처럼 휘갈기던, 내 마음의 일기 같기도 하다.

어디 그뿐이랴.

밤새워 절절히 써 내려간 마음의 자국들이 포도 알처럼 알알이 박힌 부치지 못한 연서 같기도 하고 

세월의 더께만큼 얼굴도 이름도 점점 희미해져 가는 사람들에 대한 아련한 기억의 파편들이

어느 날 불쑥 뜻밖의 방문에 놀란 사람처럼 낯선 얼굴을 하고 서로의 안부를 묻는 것 같은 느낌.

 

비 오는 여름날 처마 끝에 떨어지는 낙숫물처럼 일정 리듬을 탄 삶에 대한 끝없는 이야기,

그것만으로도 그냥 바람처럼 오래도록 옥상에 서 있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굳이 왜? 라는 이유를 설명하지 않아도.

부끄럽다.

애당초 없었는지도 모르는 그 무엇에 대한 그리움,

그 빈자리를 아직도 맴돌고 있는 내 모습,

늘 욕심을 버려야 한다고 말하면서도 한 평도 안 되는 욕심을 상쾌한 기분으로 온전히 떨쳐 버릴 수 없음이.

 

지금 창 밖에는 여름이 한창임을 알리는 매미 소리가 쌍으로 울어댄다.

산다는 것은 어쩌면 복잡함 그 이상으로 단순한 것인지도 모른다.

저 매미가 시도 때도 없이 울어대는 것처럼.

오늘은 내 기억의 창고에서 서성거리지 않아도 되는 담백한 날이 되었으면 좋겠다.

왜냐고 묻지도 말고 목구멍 너머 울려나오는 대답도 단숨에 꿀꺽 삼킨 채 그냥 그렇게 담백한 수묵화처럼.

 

 

 

 

 

2001년 여름 - 喜也 李姬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