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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과 느낌

비오는 날의 독백 - 이희숙

by 시인촌 2004. 1. 25.

그 누군가를 기다려 본 사람은 알 것이다. 어떤 형태의 기다림이든 절절하지 않은 것은 없다는 것을, 여러 날 동안 비를 머금지 못한 땅은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거북등처럼 쩍쩍 갈라져 하품만 해댔다. 그 하품하는 대지위로 조금 전부터 하늘이 삼단 같은 머리를 풀고 지상으로 조금씩 내려앉는다. 반가운 마음에 임이 오시는 마냥 들뜬 마음으로 창문을 열어젖혔다. 오늘도 많은 비를 기대하기는 틀린 모양이다.

 

커피 한잔을 마실 요량으로 쓰던 글을 멈추고 컴퓨터로부터 나를 분리시켰다. 녹색의 작은 주전자에서 물이 끓었음을 알리는 소리가 문득 기적소리를 닮았다고 생각했다. 그 생각너머 가까운 이들의 얼굴이 필름처럼 스치듯 지나간다. 비가 오지 않아서 모내기 걱정을 하시던 어머니의 얼굴과 십년을 부부로 살면서도 한결 같은 마음으로 나를 감동시키는 짝꿍의 착한 눈빛과 식성이 까다로워 잘 먹지 않아서인지 요 며칠 더 힘들어하는 아들 녀석의 마른 체구와 약간의 공주병이 있어 더 귀여운 딸아이의 얼굴이 차례차례 가슴에 와 안긴다.

 

차 한 잔이 이런저런 생각에 순식간에 바닥을 드러내고 말았다. 한잔 더 마시고 싶다는 갈증을 누르며 소파에 깊숙이 몸을 기대고 이내 눈을 감았다. 눈감은 마음 안에 여러 생각들이 여전히 머물러있음을 느낀다. 외출할 때 내 마음 내키는 대로 휴대폰을 끄는 나를 정말 이해하기 어렵다는 인연과 삶을 바라보는 시각, 특히 긍정적인 측면에서 나와 참 많이 닮았다는 느낌에 지난 일요일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해맑은 웃음을 떠올리게 한 어여쁜 이와 비가 온다고 넉넉한 마음으로 전화해 준 고마운 사람까지...

 

내게 삶이라는 커다란 그림을 느끼게 해준 많은 사람들 중 어머니의 깊고 굵게 패인 주름살이 살아온 흔적에 대한 대접인 듯 생각되어 제일 가슴을 싸하게 한다. 이토록 가녀린 비도 어머니의 마음에는 분명 기다림이란 희망을 품게 할 것이다. 어머니의 마음에 흡족한 미소가 피어오를 수 있게 오늘은 밤새 비가 내렸으면 좋겠다.

 

글 쓰는 동안 고맙게도 비는 그칠 줄 모르고 내리고 있었다. 워낙 가녀린 비라 바람에 흩날리는 안개비 같기도 하지만 오랜만에 느끼는 이 촉촉함이 나는 좋다. 오늘은 어디선가 나를 젖게 하는 많은 사람들이 그립다. 그립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 마음은 벌써 꺼둔 전화기를 찾고 있었다. 누구에게 먼저 전화할지도 모르면서 그냥 그렇게...

 

어디선가 익숙한 바람의 말이 생각을 앞세우고 심장으로 향한다.

오늘도 넌 잘 살아갈 준비가 되어있느냐고 물으며......

 

 

 

 

 

2001년 5월 비 내리는 날에 - 喜也 李姬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