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하늘이 잘 보이는 내방 침대에 누워, 며칠 전 남부도서관에서 빌려온 책(1인자를 만든 참모들 - 이철희 지음)을 읽다가 문득 의사선생님 말씀(눈을 심하게 혹사시켰군요. 병명은 안구건조증입니다. 혹, 책을 많이 읽어야 한다든지 컴퓨터 모니터 앞에 앉아있어야 하는 직업인지......)이 생각나서 읽고 있던 책을 덮고 엄숙한 의식을 치르는 사람처럼 천천히 고개를 돌려 커튼 사이로 흐르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바라보이는 밤하늘이 강물처럼 누워 흐른다는 생각을 한 건 침대 옆 장식용 스탠드를 잘못 건드려 방안이 순식간에 어두워진 바로 그 순간이었다.
가끔 하늘이 잘 보이는 침대에 누워 밤하늘을 오래도록 응시할 때면 내가 사는 풍경이 영화 속에서 봄직한 옛 중국의 어느 공간으로 이동해온 건 아닌가 싶을 정도로 착각에 빠진다. 시내중심상권과 인접해 있으면서도 앞산이라는 조망 권에 걸려 높은 건물을 지을 수 없는 까닭에 땅의 높낮이에 따라 올망졸망하게 지어져 있는 주변 풍경이 마치 자금성 뒤편으로 통하는 어디쯤이라도 되는 것 같은 생각에 애써 눈감지 않아도 절로 내 마음은 목탄으로 가는 느린 열차에 올라 내가 원하면 무엇이든 되고 그 어디라도 갈 수 있는 행운을 누렸다.
생각이 생각을 낳고 그 생각이 또 다른 생각을 불러들이는 동안에도 마음속에 난 길은 줄어드는 법 없이 영토를 확장해나갔다. 이런저런 생각이 상상 속에서 강물로 출렁이고 별들로 쏟아져 내려도 알 길 없는 짝꿍은 오래도록 물소리만 파도처럼 철썩대고 있었다. 욕실에서 들려오는 물소리에 이유 없이 내 몸도 강물처럼 따라 출렁였다. 그 출렁임 때문이었을까? 입고 있던 잠옷이 거추장스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입고 있던 잠옷이 거추장스럽다는 생각이 든 건 부드럽다 못해 한순간 미끄러지는 착각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입고 있던 잠옷을 훌훌 벗어 던지고 발끝에 닿은 이불을 살짝 잡아당겨 덮고는 살포시 눈을 감았다.
오랜 시간동안 욕실에서 철썩대던 물소리가 들리지 않는다는 걸 알아차린 건 눈앞에 펼쳐진 청록색 하늘이 눈부시다 못해 자지러질 듯 휘청거리고 있다고 생각한 바로 그 순간이었다. "웬일이야. 오늘은 책도 안보고, 벌써 자려고..." 수염까지 말끔하게 깎고 나타난 내 남자의 낯익은 음성에 화들짝 놀란 건 어쩌면 삶 속에 녹아있는 내가 아니라 때때로 나 자신조차도 해독할 수 없는 또 하나의 나, 꿈속에 살고 있는 그녀였는지도 모르겠다.
2003년 10월 26일 - 喜也 李姬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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