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태어나고 자란 고향은 동서남북 사방이 빙 둘러가며 병풍처럼 산으로 둘러싸여 있는 전형적인 시골 마을이다. 산으로 둘러 쌓인 한가운데가 마치 한라산의 백록담 같은 느낌의 호수 같이 생긴 둥글고 작은 마을, 집이라 해봐야 40가구 남짓한, 대부분 이씨 성을 가진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사는 집성촌이었다. 그 작은 마을에도 겨울은 어김없이 다가오고 개구쟁이 아이들은 동네 어귀에 있는 작은 못으로 달려가 얼음지치기와 팽이치기, 썰매타기를 하면서 추운 줄도 모르고 방학이면 아침밥을 먹기가 바쁘게 모두들 약속이나 한 것처럼 비슷한 시간에 동네 앞 못으로 모여들었다.
양반 집(그 당시만 해도 작은 시골 마을에서는 양반을 들먹거리던 시절) 종가 댁에 태어난 이유로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이전까지 추운 겨울이면 어머니께서 손수 만들어 입혀 주시던 솜 넣은 파란색과 검은색 그리고 빨간색이 적당히 조화를 이룬 덧저고리를 입고 있던 어린 꼬마 모습인 나를 삼십 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도 잊을 수가 없다. 추울세라 어머니는 겨울이 되기 전에 어린 막내딸을 위해 직접 우리 밭에 심어 수확한 목화에서 얻어낸 솜으로 다른 사람보다 유독 먼저 내 옷을 만들어 주셨는데 그 당시는 어머니의 깊은 사랑도 제대로 알지 못하던 나이라 그 두꺼운 솜옷이 싫다고 가끔은 투정을 부리기도 했다. 그런 날이면 어김없이 할머니는 재미있는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놓아야 했다. 우는 아이 떡 하나 더 주는 인심으로...
지금 친정할머니께서 살아 계셨더라면 올해로 만 100살이 되는, 1900년 생이다. 그 연세에도 할머니는 한글이며 한자, 일본어 두루두루 깨우친 해박한 분이셨다. 덕분에 나는 할머니의 재미있고 슬픈 긴 이야기에 푹 빠져서 잠들곤 했다. 내가 한글을 깨우치기 전에 할머니는 춘향전이며 심청전, 장화홍련전 같은 우리 고전이야기를 자주 들려 주셨다. 어린 나는 할머니가 거처하시는 사랑채 가장 따뜻한 아랫목에 앉아 화롯불 쬐며 그 긴 겨울밤을 잘도 보냈다.
70년대 시골 아이들에게는 또래들과 놀 마땅한 놀이터가 없었다. 물론 지금의 아이들처럼 장난감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러다 보니 자연히 개인적인 놀이보다 다분히 그룹으로 놀 수 있는 형태로 놀이문화가 자리잡았다. 가령, 겨울이 되면 눈싸움을 한다던가 그것마저도 싫증이 나면 편을 나누어 연날리기, 썰매타기, 자치기 등......
지금의 현실처럼 완구점에 가서 장난감을 구입하던 시절은 아니었기에 연이나 썰매, 윷, 자치기, 재기차기 등 놀이 재료를 저마다 집에서 아버지와 오빠 혹은 형들이 만들어 주는 것으로 모양은 좀 투박하고 멋은 없으나 튼튼함은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모두들 단단하게 잘 만들었다. 우리 나라 전체가 어렵던 그 시절 부모님들의 사랑은 자녀와 오고 가는 대화는 별로 없었지만 지금과는 비교 할 수 도 없는 정성,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한 것이었다.
긴긴 겨울 밤, 저녁을 먹고 난 뒤 식구들이 하나 둘 화롯가에 옹기종기 모여들면 어머니는 삶은 고구마와 시원한 동치미 한 사발을 밤참이라고 내 놓으셨다. 어떤 날은 채 마르지 않아 말랑말랑한 곶감이랑 홍시도 주시고 삶은 계란도 식구 수대로 덤으로 주셨다.
아버지는 어린 자녀에게 줄 썰매를 만들기 위해서 늦은 밤에도 쓱싹쓱싹 대패로 나무를 밀고 긴 대못을 박아 썰매를 만드느라 잠도 잊으시고 어머니는 그 옆에서 소매 깃이 터진 옷을 정성스레 바늘로 깁고 어린 나는 감기는 눈을 어쩌지 못하고 썰매가 다 완성한 것도 못보고 그만 깊은 잠 속으로 빠져들고 말았던 그 시절... 누구네 집 오늘 반찬에 꽁치 한 마리까지 올라왔다는 세세한 사실까지 쉽게 알 수 있었던 그 시절이 하얀 눈을 기다리는 겨울이라는 계절 앞에서 한 폭의 그리운 풍경이 되어 내 마음으로 날아드는 날이면 어릴 적 소꿉놀이 친구들에게 문득문득 전화가 하고 싶어진다. 너 요즘 어떻게 지내니? 라는 말로 시작해서 참 그 옛날이 그립다는 말로 대신 인사를 하고 싶다.
밤새 하얀 눈이 지천으로 많이 내린 다음날이면 삽과 빗자루로 눈을 쓸어다 모아서 눈사람도 만들고 처마 끝에 삐죽삐죽 굵은 대롱 같이 매달려 있는 고드름을 얼음 과자인양 아버지께 따서 달라고 떼를 써 아작아작 참 맛있게 먹었던 기억, 사랑스러운 내 두 아이에게도 그 무공해 천연 얼음 과자를 맛보게 하고 싶다. 하지만 지금은 지구 온난화 현상으로 내 어릴 적 그때처럼 많은 눈을 기대한다는 것은 성급한 내 바램일 뿐, 어린 시절에 보았던 많은 눈도 보기 힘들어졌고 그렇게 자상하던 아버지도 이미 저 세상 사람이 된지 20년도 훨씬 더 지났고 옥색 치마 저고리가 잘 어울리시던 어머니도 이제는 자신의 몸 하나 가누기도 힘든 할머니가 되어 버렸다.
어린시절 내가 느끼고 보았던 소중한 것들을 내 어린 두 아이에게도 느끼게 하고 싶고 보여 주고 싶다. 시간과 공간은 비록 달라도 자식 사랑하는 그 마음하나만은 정성으로 빗어낸 예술품처럼 내 부모님이 나에게 해주었듯이 나도 내 사랑스러운 두 아이에게 훗날 진한 향내가 나는 그리움으로 남기를 바라면서......
2000년 12월 09일 - 喜也 李姬淑
양반 집(그 당시만 해도 작은 시골 마을에서는 양반을 들먹거리던 시절) 종가 댁에 태어난 이유로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이전까지 추운 겨울이면 어머니께서 손수 만들어 입혀 주시던 솜 넣은 파란색과 검은색 그리고 빨간색이 적당히 조화를 이룬 덧저고리를 입고 있던 어린 꼬마 모습인 나를 삼십 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도 잊을 수가 없다. 추울세라 어머니는 겨울이 되기 전에 어린 막내딸을 위해 직접 우리 밭에 심어 수확한 목화에서 얻어낸 솜으로 다른 사람보다 유독 먼저 내 옷을 만들어 주셨는데 그 당시는 어머니의 깊은 사랑도 제대로 알지 못하던 나이라 그 두꺼운 솜옷이 싫다고 가끔은 투정을 부리기도 했다. 그런 날이면 어김없이 할머니는 재미있는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놓아야 했다. 우는 아이 떡 하나 더 주는 인심으로...
지금 친정할머니께서 살아 계셨더라면 올해로 만 100살이 되는, 1900년 생이다. 그 연세에도 할머니는 한글이며 한자, 일본어 두루두루 깨우친 해박한 분이셨다. 덕분에 나는 할머니의 재미있고 슬픈 긴 이야기에 푹 빠져서 잠들곤 했다. 내가 한글을 깨우치기 전에 할머니는 춘향전이며 심청전, 장화홍련전 같은 우리 고전이야기를 자주 들려 주셨다. 어린 나는 할머니가 거처하시는 사랑채 가장 따뜻한 아랫목에 앉아 화롯불 쬐며 그 긴 겨울밤을 잘도 보냈다.
70년대 시골 아이들에게는 또래들과 놀 마땅한 놀이터가 없었다. 물론 지금의 아이들처럼 장난감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러다 보니 자연히 개인적인 놀이보다 다분히 그룹으로 놀 수 있는 형태로 놀이문화가 자리잡았다. 가령, 겨울이 되면 눈싸움을 한다던가 그것마저도 싫증이 나면 편을 나누어 연날리기, 썰매타기, 자치기 등......
지금의 현실처럼 완구점에 가서 장난감을 구입하던 시절은 아니었기에 연이나 썰매, 윷, 자치기, 재기차기 등 놀이 재료를 저마다 집에서 아버지와 오빠 혹은 형들이 만들어 주는 것으로 모양은 좀 투박하고 멋은 없으나 튼튼함은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모두들 단단하게 잘 만들었다. 우리 나라 전체가 어렵던 그 시절 부모님들의 사랑은 자녀와 오고 가는 대화는 별로 없었지만 지금과는 비교 할 수 도 없는 정성,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한 것이었다.
긴긴 겨울 밤, 저녁을 먹고 난 뒤 식구들이 하나 둘 화롯가에 옹기종기 모여들면 어머니는 삶은 고구마와 시원한 동치미 한 사발을 밤참이라고 내 놓으셨다. 어떤 날은 채 마르지 않아 말랑말랑한 곶감이랑 홍시도 주시고 삶은 계란도 식구 수대로 덤으로 주셨다.
아버지는 어린 자녀에게 줄 썰매를 만들기 위해서 늦은 밤에도 쓱싹쓱싹 대패로 나무를 밀고 긴 대못을 박아 썰매를 만드느라 잠도 잊으시고 어머니는 그 옆에서 소매 깃이 터진 옷을 정성스레 바늘로 깁고 어린 나는 감기는 눈을 어쩌지 못하고 썰매가 다 완성한 것도 못보고 그만 깊은 잠 속으로 빠져들고 말았던 그 시절... 누구네 집 오늘 반찬에 꽁치 한 마리까지 올라왔다는 세세한 사실까지 쉽게 알 수 있었던 그 시절이 하얀 눈을 기다리는 겨울이라는 계절 앞에서 한 폭의 그리운 풍경이 되어 내 마음으로 날아드는 날이면 어릴 적 소꿉놀이 친구들에게 문득문득 전화가 하고 싶어진다. 너 요즘 어떻게 지내니? 라는 말로 시작해서 참 그 옛날이 그립다는 말로 대신 인사를 하고 싶다.
밤새 하얀 눈이 지천으로 많이 내린 다음날이면 삽과 빗자루로 눈을 쓸어다 모아서 눈사람도 만들고 처마 끝에 삐죽삐죽 굵은 대롱 같이 매달려 있는 고드름을 얼음 과자인양 아버지께 따서 달라고 떼를 써 아작아작 참 맛있게 먹었던 기억, 사랑스러운 내 두 아이에게도 그 무공해 천연 얼음 과자를 맛보게 하고 싶다. 하지만 지금은 지구 온난화 현상으로 내 어릴 적 그때처럼 많은 눈을 기대한다는 것은 성급한 내 바램일 뿐, 어린 시절에 보았던 많은 눈도 보기 힘들어졌고 그렇게 자상하던 아버지도 이미 저 세상 사람이 된지 20년도 훨씬 더 지났고 옥색 치마 저고리가 잘 어울리시던 어머니도 이제는 자신의 몸 하나 가누기도 힘든 할머니가 되어 버렸다.
어린시절 내가 느끼고 보았던 소중한 것들을 내 어린 두 아이에게도 느끼게 하고 싶고 보여 주고 싶다. 시간과 공간은 비록 달라도 자식 사랑하는 그 마음하나만은 정성으로 빗어낸 예술품처럼 내 부모님이 나에게 해주었듯이 나도 내 사랑스러운 두 아이에게 훗날 진한 향내가 나는 그리움으로 남기를 바라면서......
2000년 12월 09일 - 喜也 李姬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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