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7일 토요일, 딸아이 학교 수업 마치고 돌아오자마자 점심을 먹고 몇 가지 준비물을 챙겨서 거제도로 떠났다.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은 언제 태풍이 휩쓸고 갔는지 흔적을 찾을 길 없고 길가 흐드러지게 피어 있는 코스모스가 사람의 키만큼 자라 자꾸만 시선을 머물게 했다. 얼마를 달려왔을까? 갑자기 아들 녀석의 고함소리가 마른하늘에 천둥소리 같이 요란하다.
"엄마, 엄마! 하늘이 구멍이 뚫려 산에서 용암이 터진 것처럼 신기한 모습 맞죠?"
구름의 변화무쌍한 모습을 보고 외쳐대는 아들이 제법이다 싶은 게 내 마음 또한 아이들 마냥 들떠
"얘들아, 창밖을 좀 봐! 구절초랑 억새가 너무 멋있지 않니?"
"정말!... "
옆에 있던 딸아이도 동생에게 지지 않을 새라 종알종알... 어둠이 내려앉는 도로에는 두 아이의 재잘거림만 가득하고 땅 그림자마저 자취를 감춘 시간 통영으로 접어드니 열린 창문 사이로 불어오는 바람이 제법 쌀쌀했다. 가을 추수한 자리에 불을 놓은 흔적이 환하다. 바람 따라 큰 물결을 이루듯 날아가는 연기가 꿈을 꾸는 듯 몽환적이다. 생각 때문인지 근처 메밀꽃이 더 희고 아름답게 보였다.
목적지인 거제에 도착하자 아들 녀석
"엄마, 우리 어디에서 자요? 여기도 호텔 있어요? "
운전대에 손을 얹고 있던 남편이 잠시 아들을 돌아보며
"네가 언제부터 호텔에서 잤어. 겨우 6살 밖에 되지 않은 놈이..."
그러자 딸아이가 한마디 거든다.
"호텔 없으면 콘도라도 있겠지 뭐..."
참으로 요즘 아이들은 뭐든지 쉽다. 호텔에 콘도에 말만하면 뚝딱하고 나오는 요술방망이라도 있는 줄 아나보다. 거제에 들어서자 전화벨이 울렸다. 삼거리에서 우회전해서 기다리라는 전화였다. 15분 정도 차에서 내려 기다리고 있으니 먼저 온 서울 사람들이 반긴다. 안내하는 대로 따라간 곳은 어느 여관집 제일 위층이었다. 불편하겠다는 내 생각이 들켜버린 것일까 누군가 위층을 다 빌렸다는 말과 함께 하루 묵어가기에는 괜찮을 거라는 말을 덧 붙였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짐도 하나 없는 36평 규모는 되지 않을까 싶은 크기의 콘도식 가정집이었다. 여관 주인은 이사 가고 우리처럼 서너 팀이 찾아오면 아예 콘도식으로 빌려준다고 했다. 그날 저녁은 방파제로 나와 바다 바람도 쐬고 회도 먹고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다음날 아침 새벽부터 남편의 거래처 사람들과 우리 가족까지 합쳐 15명의 사람들이 내는 하모니가 시끌벅적하다. 아침을 먹고 외도로 향했다. 와현- 구조라- 몽돌해수욕장을 거쳐 오는 사이 두 꼬마는 심심했는지 빙글빙글 도는 산길에 속이 울렁거리는지 내려 달라고 아우성이었다. 잠시 쉬어가기로 하고 차에서 내린 곳은 여느 해수욕장과는 달리 모래는 거의 없고 검고 굵은 자갈이 끝없이 펼쳐진 해수욕장이었다. 주변에는 소나무가 빙 둘러져 있었고 민박집과 식당을 겸한 집들이 듬성듬성 눈에 띄었다. 그 중에서 내 눈을 확 끌어당기는 집이 있었다.
"님이여! 여기 청학에서 인생에 긴 여정을 묻고 한껏 푸념하다 가십시오. "
집주인이 어떤 사람일까 참으로 궁금했지만 여운처럼 남겨두기로 했다. 남부면 해금강 한려해상국립공원으로 들어설 때까지 잠시 잊고 있었던 두 꼬마의 논쟁은 다시 시작되었다. 바다와 하늘 그리고 우주의 끝은 있는지 없는지에 대해서... 딸아이는 누나답게 논리 정연하게 반박을 한다. 눈에 보이는 저 바다는 끝이 아니고 돌고 돌면 다시 제자리로 돌아올 수도 있는, 지구가 둥그니까 바다도 끝없이 이어져 있다는 주장에서 한 발자국도 물러설 기미가 없고 유치원생인 아들 녀석은 그래도 끝이 어딘가에 있다는 주장을 열심히 해댄다. 함목해수욕장에 도착했다. 오전 10시 5분, 해금강에 제법 굵은 비가 내리친다. 이걸 어쩌지... 봄부터 이곳 외도에 오려던 계획을 뒤로 미루고 다른 곳만 여행하다가 오늘에 이르러 겨우 왔는데 걱정이 앞선다. 파도라도 높으면 눈앞에 두고 돌아갈 사태가 생길까 못내 걱정이 앞섰다. 비가 내리는 곳도 아랑곳 않고 차들은 자꾸만 몰려들었다. 어느새 주차장은 전국에서 온 차량들로 붐비고 아이들은 창밖으로 흘러내리는 비를 보고 올챙이가 헤엄치는 것 같다며 난리를 쳐댄다. 오전 10시 11분, 비가와도 여행은 감행한다는 내 말에 하늘도 감동을 했을까? 비가 그쳤다.
내리는 빗속을 뚫고 도장포 유람선 터미널에서 주는 명찰을 무슨 훈장처럼 달고 바다여행 1호에 몸을 실었다. 배가 너무 작은 탓일까 출발한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속이 거북한 게 정신을 차릴 수가 없다. 비몽사몽간에 외도에 도착한 나는 배 멀미를 하지 않은 일행들 틈 속에서 언제 그랬냐는 듯 내리는 비에도 아랑곳 않고 두 눈을 열심히 반짝거리며 본격적인 외도 구경에 나섰다. 거제군 일운면 와현리 산 109번지, 1969년에 두 부부가 이 땅을 사들여 지금에 이르기까지 많은 노력을 기울인 흔적들이 곳곳에 숨어 있었다. 동백나무와 후박나무가 주종을 이루고 있었고 그 밖의 수십 종의 이름 모를 나무들과 꽃 풀, 눈에 익은 나무와 꽃들까지 그야말로 지상의 낙원이자 환상의 섬이었다. 얼굴 없는 천사의 조각 앞에서 아이들과 한 컷 찰칵, 원작은 파리 루브르미술관소장, B.C3세기경이라는 설명까지 읽어 내리고는 천사의 나팔이라는 길고 흰 색깔의 꽃 앞에서 또 찰칵, 아이들의 사랑스러운 모습을 카메라로 담기에 한창 열을 올리고 있을 때쯤 웬 낯선 남자의 굵은 목소리가 발길을 멈추게 했다.
“여행지에서 보면 다들 가정적인 사람 밖에 없는데 참 이상하지? 평소에 잘하지...”
듣고 보니 틀린 말 하나 없는 바른 소리였다. 그 소리를 들으며 나는 남편에게 얼마나 귀한 존재였으며 남편은 나한테서 얼마나 존경을 받고 살아왔는가에 대한 생각에 가족들보다 몇 걸음 뒤쳐졌다. 아이들 손을 잡고 열심히 설명해주고 있는 남편을 바라보니 새삼 더 고맙고 예뻤다. 사랑스럽다는 표현만으로는 어쩐지 부족한, 살면서 남자도 때로는 참으로 예쁠 때가 있다는 사실을 종종 남편에게서 느끼며 산다. 예를 들자면 아침에 일어나기가 싫어 침대에서 한참을 뒤척이는 남편의 모습에서 엉덩이를 살짝 두드려 주고 싶은 충동을 느끼고 가끔은 아주 가끔은 나를 업고 한 바퀴 빙 돌고는 하차하면서 내려줄 때, 아이들과 친구처럼 해맑게 웃어주며 놀아 줄 때도 그리고 내가 싫어하는 고기를 당연하듯 구워 줄 때도...
전망대라고 하기에는 좀 낮은, 외도에서 가장 높은 곳에 오르니 바다 풍경이 더 아름답다. 위에서 바라본 천국의 계단은 나무를 심어 마치 다리 같기도 하고 터널 같기도 하다. 몇 년을 가꾸었을까? 참으로 그 자람이 눈부시다. 그 속을 산책하듯 걸어 내려오니 조각공원이 반겼다. 아담과 이브, 공허, 여인... 제각각 그 이름에 어울리는 모습으로 사람들의 시선을 머물게 한다. 조금 더 아래로 내려오니 동심시리즈(말 타기 8점)가 재미난 표정으로 반긴다. 어린아이들의 천진난만한 모습을 제대로 표현한 원광대학교 김광재교수의 작품을 감상하고 유년시절을 떠올렸다. 11시에 도장포유람선터미널을 떠난 바다여행 1호가 12시 40분에 다시 돌아간다는 것을 알고 있는 터라 더 머물고 싶었지만 내려 올 수밖에 없었다. 산기슭 바위틈에 낚시를 하는 사람들이 제법 많았다. 낚시를 할 줄도 모르지만 그 순간만은 강태공이 되어 시간을 낚아 세월을 멈추게 하고 싶었다. 그렇게 아쉬움을 간직한 채 돌아오는 배 안에서 방송으로 그 일대의 풍경에 얽힌 전설에 대해서 열심히 귀로 담고 눈으로 풍경을 담아 왔다. 촛대바위, 갑돌이 갑순이 바위, 삼신상, 돛단배섬(일명 선녀바위), 사자바위(천년송)- y자 모양을 한 소나무, 얼핏 보기에는 어린 소나무 같아 보였는데 학자들의 주장을 빌리자면 천년은 훨씬 넘어선 것 같다는 설명에 여지저기서 와 하는 탄성이 들려왔다. 풍란, 춘란 그 밖의 약 40여종의 자생식물을 일일이 눈으로 다 확인 할 수는 없었지만 외도에서 대구 집까지 6시간을 불평한마디 하지 않고 여유를 보이며 우리 가족의 안전을 책임진 남편과 힘겨운 여행에 지칠 법도 하지만 잘 참아준 아이들... 가을햇살만큼이나 눈부신 가족 사랑을 확인 할 수 있었던 행복한 여행이었다.
참고 : 배삯 - 성인 9,000원, 어린이 4,500원
외도 입장료 - 4,300원
2000년 10월 9일 - 喜也 李姬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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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도에 적은 글을 보고 참고하시는 분이 있는 것 같아 알려 드립니다.
*** 외도 입장료 안내(2010년 기준) ***
1. 어른 : 8,000원
2. 군경. 학생(중. 고등학생):6,000원
3. 어린이(만3세 이상) : 4,000원
*** 단체 20%할인 ***
중, 고등학생 단체(30명이상) : 5,000원
어린이 단체(30명이상) : 3,200원
(어른은 단체가 없습니다)
바다 한가운데 떠 있는 아름다운 식물의 낙원,
외도로 가는 길 http://www.oedobotani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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