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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과 느낌

그리운 어머니 - 이희숙

by 시인촌 2004. 3. 6.

어머니!
간밤엔 창문을 뒤흔드는 소리가 참으로 요란했습니다.
텔레비전과 신문에서는 하루에도 몇 번씩 장마와 태풍에 피해를 입지 않도록
각별한 신경을 써 달라고 당부를 하는데

팔순의 어머니께서는 아직도 하늘이 하는 일이 못마땅한 듯
"망할 놈의 하늘 구멍이 났나? 그만 작작 쏟아 붇지, 그런다고 내 눈 하나 깜짝 할 상 싶나, 이따위 날씨 하나쯤은 아직도 거뜬하게 막아 치울 수 있다. 오십 여섯에 남편 잃고 다섯 자식 남보란 듯 잘 키우려고 마음먹은 그 순간부터 두려울 거 하나도 없었다. 희망 하나만 믿고 내 여태 이날 이때까지 자존심 굽히지 않고 잘 살아왔다. 이까짓 하늘 구멍 좀 났다고 내가 겁낼 줄 알았다면 큰 오산이다. " 하시며 더 많은 비가 내리기 전에 집안구석구석을 살피며 못내 미심쩍은 듯
갈라진 담이랑 마당 구석 틈새를 찾아

모래와 물, 시멘트를 섞어서 여기저기 땜질하듯 갈라진 틈바구니에 한 번 더 옷을 입히고

아버지가 살아 계실 때부터 사용해 오던 나무사다리를 놓고

장작처럼 마른 두 다리에 온 힘을 내리 뻗고 가만가만 사랑채 기와지붕으로 올라가시겠지요.

어머니!
종가 집 맏 종부는 태어날 때부터 다른 운명을 타고난다고 하셨는지요.
하지만 너무 혼자 강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물의 모태요, 땅의 모태인 어머니!
이제는 쉬십시오.
해마다 장마철이면 물꼬를 트는 일과 논두렁이 무너지지 않도록
말라 부지깽이가 된 손과 팔로 논 언덕을 삽으로 수천 번 더 두드리시는 어머니!
당신은 팔순이 된 이날까지 삶의 무거움을 한 번도 단호하게 내려놓으신 적이 없으십니다.

오직 자식들을 위해서 당신의 텃밭을 충실히 가꾸어 오신 정직한 땅이요, 정직한 씨앗이었습니다.
이제 당신의 삶 속에 뿌리 내린 정직한 땅과 정직한 씨앗은 자식들에게 위대한 정신적 유산으로 남겨주십시오.
그리하여 먼 훗날, 어머니 당신의 연세로 세상과 마주 섰을 때 내 자식들에게 물려 줄 유산이
어머니 당신으로부터 받은 정직한 땅과 정직한 씨앗임을 감사하며 행복한 마음으로 물려 줄 수 있지 않겠는지요.

어머니!
씨앗 하나 뿌려져서 한 그루의 나무가 되고 그 나무 자라서 열매를 맺기까지

얼마나 많은 세월과 얼마나 많은 관심과 얼마나 많은 영양분을 흡수해야 하는지 당신을 통해서 알았습니다.
어느 날 막내딸이 지나가는 말로 던진 물음을 어머니 당신은 기억하고 계신가요?
그동안 외롭지 않았냐고?
흔들리듯 파리하게 떨고 있는 당신의 눈동자를 보았습니다.
그 안엔 세월과 맞서 살아 온 조용한 인내가 있었고
침묵해도 절로 피어나는 수많은 이야기가 있음을 읽어 내렸습니다.
"외로울 틈이 없었다. 사는 게 너무 바쁘고 힘들어서......"
사는 일이 치열해서 외로울 틈도 없이 사셨던 어머니,
당신의 큰사랑이 두 아이의 엄마가 되고 보니 마냥 고맙기보다 오히려 미안해집니다.
여자로서의 행복한 삶 보다 자식들에게 디딤돌이 되기를 원했던 당신의 더운 체온이

오늘 바람 불고 비 내리는 날,

사람살이와 세상일에 아직도 많이 서툴러 어머니 당신으로부터 배우고 익혀야 할 게 많은 제 작은 가슴을

눈물겹도록 고마운 사랑으로 데우고 있습니다.

그리운 어머니!
석류꽃 보다 더 붉은 당신의 정열과
찔레꽃 보다 순한 당신의 삶을 사랑합니다.




2002년 여름, 비 내리는 날 - 喜也 李姬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