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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과 느낌

산수유 향기를 따라 - 이희숙

by 시인촌 2004. 3. 29.

지난 토요일 예정대로 88고속도로를 타고 산수유 축제마을로 길을 떠났다. 대구를 벗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도로변에는 노란 개나리가 주고받는 두 아이의 쉴 새 없는 재잘거림처럼 정겹게 피어있었고 그 풍경너머로 진달래가 듬성듬성 핏빛처럼 붉게 피어있었다. 저녁놀이 서산마루에 걸릴 무렵 구례군 산동면으로 접어들었다. 면소재지를 따라 피어있는 노란 산수유를 보면서 산동 마을에 대한 지명이름과 왜 유독 이 마을에 산수유가 많은지에 대한 이야기를 두 아이에게 들려주는 사이 차는 작지만 살아가는데 필요한 것들을 갖추고 살아가는 작은 마을의 풍경들 중 농약사, 철물점, 한약방, 신발 집, 방앗간, 교회 등을 지나쳤다. 지리산 일대를 여행할 때면 주로 남원에 있는 콘도를 이용하거나 이곳 구례에 위치한 물이 좋다는 지리산 온천 호텔을 이용하지만 이번에는 3주전에 미리 예약을 해 둔 송원리조트에 짐을 풀었다. 짐이라고 해봐야 바퀴와 손잡이가 달린 여행용가방 하나와 작은 아이스박스뿐이었지만...


다음날 아침 서둘러 온천욕을 한 탓에 뽀송뽀송한 얼굴을 하고 상위 마을을 향해 길을 나서는데 일신각 근처에서 전국미술인 스케치 행사가 한창 무르익고 있었다. 논에는 한가하게 풀을 뜯는 흑염소와 캔버스에 노란 산수유를 옮겨 넣는 미술인들이 한 낮의 봄볕에 제 각각 늘어져 있었다. 관광휴양지 마을인 산동면 상위 마을은 특산품인 고로쇠약수와 한봉, 토종닭, 흑염소, 산수유를 팔아서 생업을 꾸려가고 있는 동네로 마을 전체가 노란 꽃 봉우리에 갇힌 듯 시선 돌리는 곳곳마다 노란 색 천지였다. 아름다운 봄날 꽃송이가 너무 작아 수백 수천 송이 꽃이 서로 어우러질 때 비로소 제 빛깔과 제 모습을 드러내는 산수유 꽃이 물이 흐르는 개울가에 군락을 이루고 피어 있어 산수유향기를 따라 전국에서 몰려온 나들이객들과 한데 어우러져 산수유꽃나무를 따라 구불구불하게 둘러쳐진 돌담 위에 기대어 선 사람들의 모습이 꽃인지 얼른 분간이 가지 않을 정도로 고왔다.

 

상위마을에서 지리산온천지구까지 불과 1~2km의 거리지만 나들이 차량으로 인해 오 분 거리가 한 시간은 족히 걸렸다. 힘겹게 빠져 나온 도로 위에 햇살이 눈이 부시다 못해 차창 가득 은빛 날개 짓을 한다. 아! 저거야. 봄빛의 설렘... 산등성이가 눈처럼 하얗게 피어있는 그림 같은 마을, 한 번도 들른 적 없는 마을에 차를 세웠다. 죽정 마을이란다. 복사꽃과 매화, 산수유가 마치 한 폭의 수채화를 그려놓은 듯한 마을에서 햇살의 각도에 따라 어느 새 나도 절로 꽃이 되어 봄 속에서 익어가고 있었다.


다시 차는 구례구에서 하동 포구를 따라 19번 국도를 달렸다. 토지면의 운조루(雲鳥樓) 가까이 갈 즈음 배가 아프다는 아들 녀석으로 인해 윤이주가 유배를 당하는 불우함을 잊기 위해 대구에서 구례를 찾아와 말년을 은둔할 심산으로 지은 「구름 속의 새」처럼 '숨어사는 집'이란 뜻과 함께 구름 위를 나르는 새가 사는 빼어난 집이란 뜻을 지닌 운조루를 들르지 않고 스치며 남녘으로 차를 내달리니 어느 새 화개장터에 닿았다. 연이은 포근한 날씨덕분에 화개장터가 제법 시끄러웠다. 김동리 소설의 ‘역마’ 의 배경이며 조영남의 ‘화개장터’ 로 더 알려진 화개장터는 4월 중순쯤 새로운 모습으로 매일 장이 열리게 될 막바지 준비에 한창 바빴다.


얼마를 달렸을까? 짝꿍(남편)이 "희야, 좋아하는 갤러리 있네." 하는 것이었다. 아무리 주변을 둘러봐도 보이지 않았다. 잘못 보았나보다 하는데 1km 정도 오니까 왼편에 ‘갤러리 섬진강 옛이야기’ 가 보였다. 마음이 급했다. 저번 겨울에 왔을 때는 왜 보이지 않았을까? 꼭 들러 보고 싶은데... 한참을 달리다 어느 지점에서 차를 돌려 그곳을 향해 되돌아왔다. 절구와 돌탑, 구루마, 물레방아, 독, 쟁기와 표정이 제멋 대로인 조형물과 꽃이 묘하게 조화를 이룬 입구를 지나 실내로 들어서니 조용한 여인 둘이 아주 반갑게 맞아주었다.

 

칡즙을 시켜놓고 실내를 한 바퀴 둘러보았다. 영호남 화합의 교류장소로 문인이나 화가, 서예가들의 작품을 전시해 주기도 하며 토산품도 팔고 차도 파는 휴식과 문화의 공간을 동시에 움직이고 있는 곳이기도 했다. 차를 마시며 천천히 江山 朴六喆님의 작품 몇 점을 편안한 마음으로 감상한 뒤 2층에 있던 떼어낸 문짝 문살에 부쳐놓은 서예 두 점 ‘참 좋은 인연, 구름에 달 가듯이’ 이 갤러리 섬진강을 잘 표현한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그 곳을 나오는데 주인장이 불렀다. 컵이든 그릇이든 마음에 드는 걸로 두개 가지고 가란다. 아이들을 위해 하회탈목걸이를 선택했다. 해마다 가을에 열리는 안동하회탈춤 축제에서 사들고 오는 나무재질이 아닌 흙으로 만든 것에 유약을 발라 구워낸 목걸이를 아이들 목에 걸어주고 뽀뽀세례를 받으면서 박경리 원작의 ‘토지’ 무대가 되었던 하동으로 향했다.


지난겨울 남해에 갔다가 무주리조트 가는 길목이라 허기도 면할 겸 잠시 쉬었다 갈 요량으로 들렀을 때 먹었던 재첩국과 덮밥의 맛을 한 번 더 맛보기 위해서 진짜 원조라고 소문난 집을 찾았다. 식사시간이 아니라서 그런지 비교적 조용한 편이었다. 재첩국과 덮밥 그리고 빙어튀김을 주문했는데 입맛이 까다롭기가 여간 아닌 우리 가족은 빙어튀김은 다 먹어치웠지만 재첩국은 겨우 몇 숟갈 먹고 남겼다. 커피 한잔을 마시고 길을 재촉해 남해고속도로에 들어서니 차량행렬이 꼬리를 물고 늘어섰다. 어둑어둑 차량의 불빛 속에 갇힌 아이들은 피곤했는지 어느새 잠이 들었다.


산수유 향기를 따라 찾아간 봄은 섬진강 칠 십리 길 구비 구비 곳곳에 묻어있던 예측불허의 어여쁨 이상으로 나를 취하게 했다. 몸살처럼 퍼져 오는 아련한 떨림, 보드라운 감성이 빚어낸 좋은 느낌으로 봄날 돌담에 속삭이는 햇살과 꽃향기에 취하고 여행을 하는 도중에 만난 후한 인정에 취하고 늘 같은 거리에서 같은 온도로 사랑을 전하는 짝꿍에게 취해 버린, 술 한 잔 마시지 않고도 몸으로 온 마음으로 취해 버렸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행복이라는 느낌으로......

 

 

 


2001년 03월 27일 - 喜也 李姬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