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에 눈을 떴다. 아직 주위가 그다지 훤하지 않은 탓일까 남편은 세상 모르고 자고 있었다. 잠자는 모습이 마치 귀여운 아이처럼 순하고 예쁘다는 생각에 하마터면 곤히 잠자고 있는 남편을 깨울 뻔했다. 매일 아침 남편을 깨울 때 내가 하는 몇 개의 행동, 이를테면 남편의 입술에 내 작은 손을 가져다 그림을 그리듯 입술선 위를 맴돌거나, 부드러운 표정으로 오래도록 얼굴을 바라보며 머리를 쓰다듬어 올려주거나 얼굴을 만지작거리는, 또는 사랑스러워 어찌할 바 모르는 사람처럼 살이 많아 포근하다는 느낌이 드는 남편의 엉덩이나 배 부분에 내 얼굴을 묻고는 참 좋다라는 말을 종달새처럼 종알거리며 나만의 리듬에 맞춰 엉덩이를 톡톡 두드려주는... 그 새벽 하마터면 곤히 자고 있는 남편을 건드려 깨울 뻔했다.
잠들어 있는 남편이 깨지 않게 살며시 이부자리에서 빠져 나와 주방으로 곧장 직행해 목마름이 입술의 바싹거림을 넘어서 이내 갈증으로 변한 입술을 적셨다. 어젯밤 내가 무얼 먹었나를 곰곰이 생각도 하기 전에 또 한 컵의 물을 마셨다. 그러고 보니 오늘은 평소와 달랐다. 잠자리에서 일어나면 전신이 다 비춰지는 대형거울 앞에 앉아 습관처럼 머리를 빗고 제법 길어진 머리를 올려도 보고 요리조리 한참을 서성이는 버릇, 그 일차적인 버릇을 하지 않고 바로 물을 마셨다. 어깨에 가디건을 걸치고 베란다 창문을 열었다. 바람이 코끝에 와 닿는 느낌이 꼭 강아지풀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간지러운 듯 부드러운... 자다 말고 깨어난 그 새벽, 가만 가만 흔들리는 바람에게서 향기처럼 밀려오는 아련한 이야기를 들으며 습관처럼 얼음 몇 개를 입안에 넣고 사색의 방으로 건너왔다.
컴퓨터 한 대와 작은 소파, 액자, 거울 그리고 근래에 사다 모은 몇 종류의 책들이 새장 속에 갇힌 새처럼 원목으로 만든 책장의 문이 수시로 열리기를 바라는... 이곳에 있는 책들은 모두 날 위한 책이다. 이 말을 바꿔 말하면 내 취향대로 내가 사다 모은 책이라는 뜻이다. ‘사색의 방’이라 부르길 좋아하는 이방에 들어오면 나는 먼 옛날, 어떤 영토의 지배자가 된 듯 권세를 누린다. 굳이 문을 걸어 잠그지 않아도 특별한 볼일이 없는 한 예고 없는 침입자가 되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가족 덕분에...
갑자기 이런 생각을 해 본다. 만약 "그녀는 특별하다" 라는 칼럼제목을 "이 여자가 사는 법"이라고 했다면 좀 더 나를 편안하게 드러낼 수 있었을까... 그랬다면 오늘 아침 남편과 주고받은 말까지 미주알 고주알 이야기하며 어때요?... 재미있어요?... 라고 해야하나.
"자기야! 수염 단정하게 깎아."
"오늘 머리 깎으러 가서 할게. 수염이 까칠하게 있으니까 착해 보이고 괜찮은데..."
"난 부드러운 남자가 좋아. 수염 깎은 자기 얼굴 얼마나 좋아하는지 알면서 그래."
날마다 되풀이되는 일상 같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놀랄 만큼 다른 나날이었다. 매번 먹는 듯한 반찬도 거의 조금씩 달랐고 식사시간도 일어나는 시간도 달랐으며 가족들과 주고받는 인사말 한마디까지도 늘 귀에 익숙한 같은 말처럼 느껴지지만 변화는 날씨 마냥 상황에 따라 저마다 다른 음계로 노래하고 있었다.
살면서 만약이라는 물음표를 얼마나 많이 던지며 살았는지 내 자신조차도 가늠할 수가 없지만 이런저런 이유로 가지 않은 길에 대한 선택에 대해 실오라기 같은 희망을 만약(IF)이라는 허상 안에 저금하듯 차곡차곡 모아두었다. 비록 그런 것들이 허망한 그 무엇일지라도 살아있음에 채워지지 못한 꿈들을 완전히 버리고 살수는 없음으로.
만약에 대한 내가 품고 살아가는 물음표는 몇 개나 될까?
만약 내가 지금보다 십 년만 더 젊었다면?
만약 내가 여자가 아닌 남자였다면?
만약 내가 지금보다 더 부자였다면?
만약이 주는 끝없는 생각들은 현실과는 좀 동떨어졌지만 때때로 단비와도 같은 촉매제로서의 역할도 할 수 있음을 안다. 비록 이룰 수 없는 꿈일지라도 자신을 뒤돌아보게도 하고 앞으로 나아가게도 하는, 오늘 난 만약에 대한 작은 물음표가 후회가 아닌 앞으로의 인생에 대한 좀 더 투명한 꿈들로 연결이 되었으면 한다. 늦었다는 생각의 발견이 할 수 있다는 자신으로 돌아서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2001년 02월 11일 - 喜也 李姬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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