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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과 느낌

아카시향기 바람에 날리다 - 이희숙

by 시인촌 2004. 5. 4.

아카시 축제가 열리는 경북 칠곡군 신동 재로 접어드니 열어 둔 창문으로 넘나드는 향기가 화장을 끝내고 뒷마무리로 살짝 뿌릴 듯 말 듯 한 두 방울 떨어트리는 내가 좋아하는 향수 냄새를 닮았다. 자연이 만들고 자연이 사람들에게 선물하는 오묘한 빛깔과 향기가 그윽하다 못해 내 전신을 마비시키는 듯 했다.

 

지난 주 청도 소싸움축제와 그 주변을 구경할 때보다 보이는 산 빛과 뿜어져 나오는 온갖 꽃들의 향내가 한참 무르익은 여인의 속살처럼 보드랍고 향기롭다. 무엇부터 볼까 잠시 주춤거리는 내게 아들녀석은 산으로 올라가자는 한마디만 휑하니 던져놓고는 다람쥐 마냥 벌써 저만치 달아나고 있었다.

 

그 뒤를 따라 오르고 있는 내 눈앞에는 고사리, 사매(뱀딸기), 망개, 찔레꽃, 오동나무, 갈근(葛根-칡) 등 눈에 익은 수십 종류의 나무와 들꽃들이 서로 어우러져 부끄러운 듯 그 속내를 보일 듯 말 듯한 자태로 저마다 다른 몸짓으로 내 방문에 환하게 화답을 했다. 아름드리 큰 소나무와 이름 모르는 들풀들에게 눈인사하며 올려다 본 하늘은 빼곡하게 들어 선 온갖 나무들의 푸름에 그저 말이 필요 없어도 좋았다. 살랑대는 바람과 언뜻 언뜻 보이는 저 기 저 먼 하늘 끝 어딘가에 또 다른 낙원이 있을 것만 같아 눈을 감고 아주 오랫동안 말없이 장승처럼 서 있었다.

 

양옆으로 아카시 나무가 드리워진 가로수 길 한쪽으로 칠곡 공공도서관 ‘난설독서회’ 회원들의 길거리 시화전이 열리고 있었다. 나무와 나무사이에 끈을 매달아 놓은 그 줄에 코팅을 한 작은 네모 틀 안에 글쓴이의 마음으로 들어앉은 시어(詩語)들이 바람에 너울너울 춤을 추고 있었다. 제법 많은 사람들의 작품을 제대로 감상하려면 꽤 많은 시간이 소요하겠다 싶어 엄마인 내가 시(詩) 감상하는 동안 그 시간이 지루하다고 빨리 다른 곳으로 이동하자고 두 아이가 조르지는 않을까 내심 걱정을 했는데 아니나다를까 마음을 확 잡아끄는 작품 앞에 오래 머무는 내게 대충 읽고 그냥 지나가면 안되냐고 두 아이는 아우성이었다. 자연 속에서 아무에게도 방해받지 않고 내가 자연인 듯 취하고 싶었는데 결국 보채는 아이들 때문에 몇 작품은 글쓴이의 감정에 가까이 다가가지도 못한 채 그저 읽어 내리기만 한 것이 못내 아쉬웠다.

 

♣ 인터넷상에서 어떤 분이 풀어놓은 수녀님들이 대접한 아카시 튀김에 대한 글을 읽은 적은 있었지만 정말 내 눈으로 직접 볼 줄은 몰랐다. 처음 접해 본 아카시 꽃잎으로 만든 여러 종류의 별난 음식들을 구경하니 입안에 군침이 돌았다. 야채를 싫어하는 아이들도 모양 나게 만들어놓은 음식들 앞에서는 먹고 싶었던지 아카시 꽃잎을 넣은 부침을 먹어보자고 먼저 제안을 했다. 사람의 느낌이란 참으로 별나다. 생각 때문인지 정말 아카시 향기가 내 입안에 그윽하게 고이는 듯 했다.

 

행사장 곳곳에 볼거리 먹을거리가 다른 축제현장보다 좀 더 풍성했으며 산 속인데도 몇 M 간격으로 설치된 이동화장실과 휴지통 그리고 먹는 물 또한 끓인 보리차 물과 생수 두 종류로 준비한 주최측의 세심한 배려와 다른 축제현장과는 달리 특별히 비싸다는 바가지 상혼도 없었으며 대학생들로 구성된 자원봉사자들과 그 밖의 행사요원들 덕분에 한국의 야생화와 종이 접기로 만든 다양한 작품 봉침(蜂針)으로 무료 봉사하는 곳, 기네스북에 오른 벌 사나이 안상규씨의 사인회 옆에 벌들도 원하는 남북통일이라는 우리 나라 지도 모형 안에 수 십 만 마리의 벌떼들을 구경하는 동안 별 불편함 없이 오후 시간을 즐길 수 있었다.
 
산 속에 어둠이 찾아드니 낮에 놀러온 많은 사람들이 거의 다 돌아가고 주변은 젊은 사람들만 남았다. 54단 군악대의 연주와 대구예술대학교 학생들의 판소리와 민요 가야금병창, 판 굿 또한 볼만했지만 저녁 8시부터 시작 된 대구예술대학교 교수들로 이루어진 아카시 음악제가 그날 축제의 마지막 행사이자 봄밤의 낭만을 느끼게 하는 데 손색이 없었다. 산 속에서 펼쳐진 음악회란 정말 음식으로 따지면 별미였다.

 

무성한 아카시 나무사이로 하늘이 그린 듯 내려오는 오월 밤, 섹스폰과 피아노 그리고 콘트라베이스의 선율에 난 서서히 취했다. 나이가 들면서 술만 취하는 게 아니란 걸 알았다. 사람, 꽃, 나무, 음악, 그림, 연극 등... 살면서 나를 취하게 하는 것들이 참으로 많다는 것을 느끼며 난 얼마나 행복한 사람인가를 종종 생각해내곤 한다.

 

이런 나에게 가끔 딸아이가 일침을 놓는다. "엄마 또 취한다. 아유, 공주병." 생글거리며 엄마를 놀리듯 하는 딸아이의 말이 싫기는커녕 오히려 더 예뻐 보이는 건 또 무슨 이유인지 내 마음을 알다가도 모르겠다. 남편은 내 이런 풍요로운 감성을 방해하고 싶지 않아서 미술전시회나 조각공원, 종이공예 등 눈으로 보고 느끼는 전시회에 가면 늘 아들 녀석을 데리고 나보다 한발 앞서간다. 천천히 감상하라는 말과 함께... 
 
그 날 밤 음악회의 마지막은 ‘보리밭’이란 가곡을 다 함께 부르는 걸로 마무리를 했다. 나도 남편도 옆 사람 눈치보지 않고 산 속에서 하늘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 아니, 마음을 열었다.
♪ 보리밭 사잇길로 걸어가면 뉘 부르는 소리 있어 발을 멈춘다......♪
아카시 향기가 바람에 날리는 오월의 밤은 아주 달고 향기로웠다.
그날 내가 품은 오월의 산 빛과 달고 향기로웠던 느낌이 앞으로 펼쳐질 내 인생에
작지만 귀한 그리움으로 남기를 바라면서 하루를 마감했다.
 

주)아카시(일명 아카시아)

 

 


2001년 05월 20일 -  喜也 李姬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