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섯째 날(2006년 01월 20일 금요일)
‘반지의 제왕’, ‘스타워즈’, ‘실미도’, ‘번지점프를 하다’ 등 영화촬영지로 각광을 받을 만큼 아름다운 자연의 나라 뉴질랜드는 경마장이 72개나 되고 골프가 사회체육이라고 할 정도로 운동 등 클럽이 성행하고 있다. 그래서인지 어디를 가나 운동하는 사람들을 여행도중 쉽게 만날 수 있었다. 운동을 하는 이유가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낯선 이국 땅에서 살아가야 하는 이민자들의 대부분은 언어 배우는데 유리할 뿐만 아니라 친구 사귀는데도 도움이 된다는 이유로 클럽에 많이 가입한다고 한다. 벽돌집이 인상적이었던 호주와 달리 뉴질랜드는 목조건물이 많았다. 한없이 넓은 풀밭과 낮게만 느껴지는 하늘과 목조건물의 조화가 아름다운 뉴질랜드에서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여행지 중 한곳인 테푸이아 마오리 민속촌에 도착했다.
테푸이아 마오리 민속촌은 로토루아에서 가장 큰 지열지대로 마오리족의 문화가 잘 보존되어 있는 곳이다. 와카레와레와에서 가장 볼만한 것은 커다란 지열지대에 여러 형태의 다양한 온천이 모여있는 간헐천인데 수증기가 피어오르는 지열지대에 만들어져 있는 길을 따라 가다보면 내 자신이 이승과 저승의 경계에 와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들 정도로 일순간 알 수 없는 두려움이 온몸을 훑고 지나갔다. 쉴새 없이 보글보글 끓고 있는 간헐천에 있는 진흙을 온몸에 발라보면 너도나도 자연미인이 되지 않을까 하는 누군가의 말에 한술 더 뜬 누군가는 내려가서 퍼 가지고 오라며 은근슬쩍 부추겼지만 말하는 이도 듣는 이도 그냥 해보는 소리라는 걸 알기에 누구하나 실제로 지천에 널려있는 진흙은 손으로도 만져보지 못했다.
온돌처럼 놓여져 있는 돌 위에 살며시 앉아보라는 여행사부장님의 말에 모두들 말 잘 듣는 유치원생들처럼 일제히 돌 위에 앉아보는 경험을 해보았는데 어찌나 뜨겁던지 한곳에 오래도록 머무를 수도 없었지만 자연이 주는 선물이 너무나 마음에 들었던 몇몇 사람들은 여기서 찜질이나 하고 가자며 누워버렸다. 자연이 주는 신비스러움에 감탄을 하며 다시 왔던 길로 되돌아가 마오리 집회장과 전투용 카누 등이 전시되어 있는 마오리 예술공예관과 바로 옆에 있는 공예학교를 구경하였다.
오클랜드로 이동하는 도중 양모완제품을 생산하는 공장에 들렀는데 사장님과 직원이 모두 우리나라 교민이어서 반가운 마음도 있었으나 그렇다고 해서 이 삼백 만원 하는 카펫을 사고 싶을 정도로 내 마음을 움직이지는 못했다. 그들의 친절한 설명에도 구매의사를 나타내지 않자 직원 중 한 명이 포기하지 않고 우리나라 백화점에서 파는 물건보다 가격이나 품질에서 앞선다는 걸 강조하며 나를 설득하려고 애를 썼지만 끝끝내 나는 몇 십 만원 하는 이불조차도 사지 않았다. 그곳에서 그 어떤 물건도 살 생각을 하지 않은 이유는 아줌마관광객들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일, 즉 별로 필요하지도 계획에도 없던 일이지만 다른 사람이 사니까 다른 사람이 좋다니까 하는 식의 즉흥적 쇼핑을 나는 정말로 원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오클랜드에서 가장 높은 화산분화구인 에덴동산으로 갔다. 오클랜드 항과 오클랜드 중심전망이 한눈에 볼 수 있는 그곳은 오클랜드 지표점이 바뀌는 곳이며 세계 지표점의 중심이 되는 곳이기도 했다. 도심 한가운데 그것도 역원뿔형 분하구 안에서 한가로이 풀을 뜯고 있는 소들을 보는 순간, 자연의 나라라는 실감에 앞서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숲과 잔디가 잘 어우러진 그곳에서 한참을 쉬고 난 후 오클랜드 시내관광에 나섰다. 시내관광이라 해봐야 스치는 풍경마다 가이드의 설명을 들으며 차안에서 만족하는 정도였지만 느리게 가는 차 덕분에 수박 겉 핥기식 관광은 되지 않았나 싶다. 뉴질랜드 최고의 휴양지 미션베이(Mission Bay)로 향하기 전에 들렀던 면세점에서 마오리족들이 직접 만든 공예품을 하나 샀다. 호주에서 미처 다 사용하지 못한 달러가 제법 있어 그 돈으로 샀는데 돈을 소비하고도 으쓱할 정도로 기분이 좋은 건 여행 중 처음 있는 일은 아니었지만 돈으로 공예품을 바꾼 순간부터 괜스레 기분이 더 최고조로 달했다.
오클랜드 시내에서 차로 약 10분이면 갈 수 있는 거리에 있는 바닷가 도시인 미션베이는 크리스마스 즈음에 빨간 꽃을 피운다고 해서 크리스마스 트리라고 부르기도 한다는 포드카와 나무가 들어서는 초입부터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다. 미션베이는 오클랜드에서 가장 비싼 땅이라는 가이드의 설명대로 외관상 보여지는 주변 집들의 모습은 뉴질랜드에 도착해서 본 여느 집들보다 멋져 보였으며 머무는 동안 바다 특유의 냄새인 짠내와 비린내가 나지 않아 무엇보다 좋았다. 해안도로는 운동코스(달리기나 마라톤, 자전거 타기 등)로 유명하다고 했는데 우리가 찾아간 그 날은 해안도로뿐만 아니라 해변 곳곳에 비키니 차림의 일광욕하는 사람들과 발리볼 하는 사람, 산책하는 사람, 준비해온 음식을 돗자리 위에 펼쳐 놓고 먹는 사람 등 관광객들과 그곳 주민들로 보이는 사람들이 한낮의 시간을 즐기고 있었다.
아름다운 분수 앞에서 물장구 치는 개구쟁이들을 바라보다 미션베이에 들르면 꼭 한번은 맛보아야한다는 아이스크림 가게로 갔다. 와플처럼 생긴 크고 넓은 과자 안에 아이스크림을 담아주는 것도 놀라운데 아이스크림 양이 어찌나 많던지 자리에 앉아 스푼으로 먹고 또 떠먹어도 쉬 줄지 않아 햇살이 좋은 거리로 나왔다. 카페가 늘어선 거리를 유유히 걸으며 보기에도 푸짐하고 맛도 좋은 아이스크림을 먹는 재미란 여행에서의 별미라고 할 만큼 색다른 즐거움이 되었다.
미션베이만 해도 네 가구당 한 가구 꼴로 요트나 보트를 보유하고 있을 정도로 요트와 보트 만드는 기술이 세계 최고 수준이라는 뉴질랜드는 요트나 보트 만드는 소재인 카우리 나무로 군함도 만들고 바닷물 속에 박아놓아 방파제 역할도 한다고 했다. 그림 속에서나 봄직한 풍경들, 이를테면 맑고 푸른 바다, 바다 위를 유유히 떠다니는 요트나 보트, 연인들끼리 사랑을 속삭이는 다정한 모습 그리고 일광욕하는 여인들이 한데 어우러져 최고의 휴양지라는 이름에 어울리는 낭만을 선물해주고 있는 미션베이를 뒤로하고 장미의 정원으로 향했다. 장미의 정원은 규모는 작지만 여행을 떠나올 때 우리나라 계절이 겨울이라 그런지 피어있는 장미꽃들이 새로운 느낌으로 다가왔다.
7박 8일간의 일정으로 떠났던 호주와 뉴질랜드 여행 중 이틀을 기내에서 보내야하는 이유로 여행 여섯째 날이 실제로는 여행 마지막 날이 되고 말았다. 밤 8시 30분에 이륙하는 인천 국제공항 향발 KE824 비행기를 기다리는 동안 너나 할 것 없이 보고싶은 가족이 기다리는 집으로 돌아간다는 기쁨보다 짧은 여행일정이었음에도 정이든 사람들과 헤어져야 한다는 아쉬움에 서로의 이메일주소와 전화번호를 주고받으며 자신이 살고 있는 지방에 올 기회가 있으면 연락하라는 인사나누기에 바빴다. 비행기가 이륙하고 얼마쯤 지나자 기내식이 나왔지만 공항으로 오기 전 이른 저녁을 먹은 후라 먹는 시늉만 하고 남겼다. 밤이 깊어가자 비행기 안에 있던 사람들은 도미노 쓰러지듯 하나 둘 차례가 되었다는 듯 잠 속으로 빠져들었지만 잠을 이룰 수가 없었던 나는 가지고 간 책 중에서 미처 다 읽지 못한 책(지구 밖으로 행군하라 - 한비야)을 꺼내 읽기 시작했다. 그렇게 책과 친구가 되어 시간을 보내는 동안 딸아이는 올 때 거의 뜬눈으로 지새다 시피하며 책을 읽던 모습과 달리 내 어깨에 비스듬히 기대어 잘도 잤다.
리무진에 몸을 싣고 대구로 오는 동안 눈에 익은 야트막한 언덕과 병풍처럼 둘러 쌓인 산과 옹기종기 모여있는 집들의 모습이 겨울새벽 안개를 걷어내고 서서히 본래의 모습을 되찾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니 내 안에 존재하는 낯설음과 익숙함에 대한 경계가 어쩌면 저 여리고 풋풋한 겨울새벽 안개와도 같을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경계라는 단어가 머릿속에서 불꽃처럼 튀어 오르는 사이 내 자신이 여전히 길 위에 서 있음과 언제 끝날지 모를 아름다운 인생의 여행 중에 있음을 기억해냈다.
아침 8시를 넘긴 시간 문경휴게소에 내려 간단하게 우동 한 그릇씩을 먹었다. 사십대 초반이라 많은 나이라 할 수 없는데도 문화탐방에 참여한 사람들 중에서 제일 나이가 많은 위치에 서게 된 나는 언니, 누나의 마음이 되어 함께 한 일행들에게 뭐라도 먹여서 각자의 집으로 보내고 싶었다. 이런 내 마음을 알 턱이 없는 사람들은 이른 새벽에 기내에서 아침을 먹은 탓인지 아니면 부담을 준다고 생각해서인지 몇 몇은 아예 차에서 내리지도 않았다. 뭘 먹을까 고민하던 사람들이 우동이 너무 먹고 싶었다고 이야기하는 올해 중학교에 입학하는 여자아이 유리의 말에 만장일치로 우동 한 그릇씩을 비웠다. 쌀쌀한 겨울아침에 몇 만원의 행복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키우고 있는 진돗개를 그것도 추운 겨울에 홀로 둘 수 없어 가족 모두 함께 떠날 수 없었던 이번 여행에서 가장 큰 소득을 꼽으라면 가족만큼 소중하고 고마운 존재는 없다는 사실을 떠난 자와 남은 자 모두 가슴 벅차도록 느꼈다는 사실이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어느 곳을 가든 누구랑 가든 떠날 수 있는 여건이 되는 것만으로도 그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다 라고, 그리고 또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무엇을 보고 무엇을 듣고 무엇을 먹고 어떻게 말하고 행동하느냐 하는 점도 중요하지만 낯선 곳에서 낯선 사람들과의 뜻밖의 만남은 분명 사람을 성숙하게 하고 성장하게 하고 스스로를 낮추는 법을 배운다고...
떠날 때의 설렘 못지 않게 돌아올 때의 설렘도 사람의 마음을 적잖이 흥분시켰다. 내가 없는 동안 전화통화에서처럼 정말 잘먹고 잘살았는지도 궁금했지만 만나면 무슨 말부터 시작하고 어떤 표정을 지어야 그동안의 보고싶었던 애틋한 내 마음을 표현할 수 있을지 별의별 게 다 신경 쓰일 만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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