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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과향기

뉴질랜드여행기 - 이희숙

by 시인촌 2006. 3. 13.

다섯째 날(2006년 01월 19일 목요일)

 

 

워낙 추위를 많이 타는 체질인 나는 남태평양에 있는 섬나라 뉴질랜드를 여행할 때 기온이 따스한 북섬은 선택하고 빙하협곡과 만년설을 조망할 수 있는 남섬은 제외시켰다. 이 기회에 남섬도 포함하라는 남편의 권유도 있었지만 여행 일정이 길어지면 내가 없는 동안 남편과 아들녀석이 겪어야 할 불편이 이만저만 아닐 거라는 점이 추위를 타는 신체조건보다 짐이 더 많이 늘어나는 불편함보다 여행일정을 결정할 때 우선적으로 작용했다. 아무튼 집 떠나온 지 엿새가 되자 여행 중 생활이 점점 편안하게 느껴지고 익숙해져갔다. 호주에서 첫 밤을 지낸 다음날 아침 호텔직원으로부터 걸려온 모닝콜에 비몽사몽간 우리말로 대답한 것과 달리 자연스럽게 영어로 전화도 받고 여행 중 필요한 물건을 사거나 궁금한 게 있으면 다가가 의사표현을 할 정도로 생활영어로 대화하는 것에 탄력이 붙기 시작했다.

 

베타수역이 세계에서 가장 넓은 나라 뉴질랜드는 나체족도 많고 동성애자한테 부부인정도 해주는 나라지만 뉴질랜드 남자들은 결혼을 기피하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 이유를 들어보니 우리나라와 달리 이혼을 하면 아이 양육권과 경제를 모두 여자에게 빼앗기기 때문에 이혼한 남자들 중 대부분은 알거지가 되기 쉽고 이혼 후에도 아이양육비를 책임져야하는 남자들은 경제난으로부터 해방되고 싶은 마음에 전처의 재혼을 위해 친한 친구에게까지 소개하는 기막힌 일도 더러 있다고 한다. 종가 집에서 태어난 내 사고방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도 없지만 경제적 부담이 얼마나 컸으면 저런 생각까지 하나 싶어 씁쓰레한 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도시 일대가 간헐천이나 열탕 호수 등의 지열지대로 알려져 있어 매년 많은 관광객들이 방문하는 곳인 호반의 도시 타우포로 이동했다. 만년설에서 녹아 내리는 물이 호수로 흘러들고 있다는 타우포 호수는 송어가 살기 좋을 만큼 물이 맑았으며 바람이 불면 바다처럼 파도가 친다는 넓은 호수는 뉴질랜드 최대의 호수라는 말을 실감케 했다. 바다라고 착각할 만큼 넓은 호수 앞에 서니 어느 순간 내 마음이 호수 위를 떠다니는 새들처럼 자연과 하나가 된 듯 겸손해지고 있었다. 낮아진다는 것이 그토록 가볍고 평온하다는 것을 모르는 바 아니지만 그 순간 나는 낯선 여행지에서 몸과 마음이 가벼워지는 즐거움을 경험하고 있었다.

 

타우포 호수에 머무를 때만 해도 멀쩡하던 날씨가 후카폭포로 향하는 도중에 비로 바뀌었지만 폭포에 도착하니 고맙게도 비가 그쳤다. 마오리어로 ‘물거품’이라는 뜻을 가졌다는 후카폭포는 폭이 좁고 물이 맑아서인지 돌과 바위사이를 휘감고 치며 흘러내리는 옥빛의 물은 가히 환상이었다. 순리를 거스르지 않고 생긴 그대로의 자연스러운 모습으로 흘러가는 후카폭포 앞에 서니 가슴에서 박하향내가 나는 듯 싸하면서도 시원한 느낌이 들어 오래 머물렀으면 좋겠다고 내심 바랬지만 일행을 태운 차는 은은하면서도 질리지 않는 옥색의 물빛을 뒤로하고 다음 목적지를 향해 달렸다.

 

이병헌, 이은주 주연의‘번지점프를 하다’의 영화 촬영지로 사용했다는 점프대가 있는 곳으로 이동하는 도중 그쳤던 비가 다시 내리기 시작했다. 내리는 비를 굳이 피할 생각도 없었지만 피할 자리도 마땅치 않은 번지점프대는 절벽아래를 미처 살피기 전에는 어수선하다는 인상을 받았지만 주변을 내려다 본 느낌은 먼 나라까지 와서 영화촬영을 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한번 뛰어내리는데 필요한 돈만 뉴질랜드 돈으로 99달러였던 번지점프는 뛰어내리는 모습을 비디오로 촬영하는 것과 사진을 찍는 것에도 별도의 비용을 필요로 했다. 너무 비싸다는 반응을 보이면서도 한번도 해보지 못한 경험을 하고 싶었던지 올해 대학에 들어간다는 남학생과 가방을 잃어버려 일행들 가슴을 답답하게 했던 여학생이 차례로 번지점프대로 올랐다. 모두들 디지털카메라와 사진기를 들고 멋진 장면을 찍어주겠다고 우정을 과시했지만 워낙 한순간에 떨어지는 번지점프를 어설픈 위치에서 멋지게 촬영한다는 건 거의 불가능해 보였다. 번지점프를 한 두 사람이 보트를 타고 다시 땅위로 올라와 일행들이 있는 곳까지 걸어올 때 모두들 용감한 전사를 맞이하는 기분으로 환영의 박수를 힘차게 쳤다. 번지점프대를 나와 차에 오르니 피곤이 몰려왔다. 잠깐 눈이라도 부쳐야겠다고 생각하며 눈을 감았지만 잠은 오지 않고 기억을 먹고사는 내 가슴에 ‘번지점프를 하다’작품 속의 여주인공인 인태희가 찾아왔다. 그녀 생각에 잠겨있는 동안 슬픔인지 아픔인지 가늠할 수 없는 감정이 신경마디마디를 자극했다.

 

로토루아로 가는 길에 땅 속에 매장되어있는 무궁무진한 온천증기를 이용해서 전력을 생산해낸다는 지열발전소를 구경했다. 직접 눈앞에서 본 건 아니고 가까운 산등성이에 차를 세워두고 아래를 내려다보았는데 하얀 연기가 쉴새 없이 뿜어져 나오는 모습이 일반공장의 모습과 별반 차이가 없었다. 무분별한 개발대신 두고두고 사용할 수 있는 방법을 선택한 뉴질랜드인들에게서 진정 자연을 사랑하는 마음을 엿볼 수 있어서 좋았고 무엇보다 자연이 인간에게 돌려주는 이익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그들의 지혜에 새삼 감탄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점심 식사 후 수십 가지의 자연산 송어들이 서식하는 생태공원‘파라다이스 밸리 송어 양식장’에 들렀다. 다양한 나무들로 빼곡하게 들어서 있는 그곳에는 크기와 색깔, 모습까지 다양한 송어이외에도 80살이나 되었다는 장어를 비롯하여 사자, 캥거루, 사슴, 원숭이, 오리 등이 있어 걷는 도중 볼거리를 제공했다. 물이 맑아 그냥 마셔도 좋다는 용천수를 너도나도 앞다투어 마시며 그곳을 나와 영화 ‘쥬라기공원’을 촬영한 곳으로도 알려진 레드우드 수목원으로 향했다.

 

우리나라 제주도 크기보다 더 크다는 레드우드 수목원에 들어서자 아름드리 큰 나무들로 인해 어디가 하늘이고 어디가 남쪽인지 분간조차 힘들었다. 큰 나무는 한 그루에 우리 돈으로 사천만원을 호가할 정도니 레드우드 수목원에 있는 나무는 뉴질랜드 정부에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외화벌이가 되고 있었다. 겨울이 없는 온화한 기후와 나무가 자라기 좋은 토질 그리고 적당한 강수량 때문이겠지만 이곳에서의 나무의 성장속도는 우리나라에서 100년 이상 된 나무로 자라려면 이곳에서는 50년 정도만 자라면 그 크기로 된다는 설명에는 뭐라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내렸다 그쳤다 하기를 반복하는 날씨 때문에 여행하기에 불편한 점도 없지 않았으나 물이 잘 빠지는 토양덕분에 비 그친 산 속을 걷는데 질퍽하다는 느낌은 전혀 없었다. 천천히 걸으며 삼림욕 하는데 개를 데리고 산책 나온 여인과 마주쳤다. 놀랍게도 그녀는 맨발이었다. 그만큼 레드우드 수목원에는 보드라운 흙과 쌓인 낙엽들로 인해 비 내린 후에 맨발로 산책을 해도 무리가 없을 정도로 발에 닿는 땅의 느낌이 좋았다. 어린이놀이터에 많이 사용된다는 레드우드 나무는 켈리포니아 전나무인데 레드우드 수목원에는 전나무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잎사귀가 넓고 어른의 키를 훌쩍 넘긴 고사리와 하늘을 찌를 듯한 모습으로 빼곡하게 들어차 있는 아름드리 나무들로 인해 내 자신이 원시림 속에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착각마저 들 정도로 어디를 둘러보아도 잘 가꾸어진 산림이 주인이었다.

 

저녁을 먹은 후 어른들은 전날 약속대로 노래방에 가기로 하고 그곳 현지사정이 아이들의 노래방출입을 제한하고 있는 규정 때문에 딸아이를 비롯해 열 명의 아이들은 어쩔 수 없이 호텔에 남게되었다. 노래방 입구에 들어서기도 전에 귀에 익숙한 곡이 인도까지 들려 우리보다 먼저 도착한 한국에서 온 다른 여행객들이 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처음에는 서로 먼저 노래하라고 등 떠밀다시피 하던 사람들도 시간이 흐르자 알아서 노래할 정도로 적극적이었다. 학교 때 밴드를 했다는 여행사 부장님의 노래실력은 가수라고 해도 믿을 만큼 여자 다섯, 남자 둘 중에서 최고였고 그에 질세라 가이드를 하려면 노는 것도 잘해야 한다는 말을 뒷받침하기라도 하는 듯 가이드 역시 노래실력이 대단했다. 삼십대 후반이라는 두 남자의 적극적인 춤과 노래로 시간이 흐름에 따라 점점 노래방 분위기는 상승세를 탔지만 일곱 명 중 유일하게 마흔을 넘긴 나는 적극적으로 놀 수도 그렇다고 뒤에서 구경만 할 수도 없는 참으로 어색한 자리였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인가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나 역시도 그 자리를 즐기는 편에 서게 되었다. 덕분에 내숭이라는 소리를 듣게되었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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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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