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째 날(2006년 01월 18일 수요일)
오클랜드에 도착해 첫 밤을 지낸 호텔에서 아침을 먹은 후 짐을 챙겨 유황의 도시인 로토루아로 이동했다. 한 시간 남짓 차로 이동했을 즈음 중학교졸업기념으로 호주와 뉴질랜드문화탐방에 합류했다는 여학생 한 명이 여권과 지갑 등 중요한 물건이 들어있는 작은 가방 하나를 호텔에 두고 나온 것 같다며 안절부절 어찌할 바 몰라하며 돌아갈 수 없느냐고 가이드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반지의 제왕, 스타워즈, 실미도, 번지점프를 하다.’ 등의 무수한 영화를 이곳 뉴질랜드에서 찍었다는 이야기를 들려주었을 때 모두들 그렇구나 하는 호기심 가득한 눈망울을 반짝이던 어여쁜 눈들이 일제히 근심어린 눈으로 바뀌며 차 안 공기는 무거워졌다. 가이드는 여행을 하다보면 흔히 있는 일이라며 가방을 잃어버린 여학생에게는 걱정하지 말라는 위로를, 일행들에게는 여권과 지갑은 어떠한 순간에도 잘 챙기라는 당부를 잊지 않았다. 호텔과 여행사에 전화를 걸어 도움을 요청하는 등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여주던 가이드는 여행일정을 혼자 마음대로 조정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니라는 걸 설명하면서 당장 가방의 행방을 확인할 수 없어 애태우고 있는 여학생에게 곧 찾을 거라는 말로 안심을 시킨 뒤 중단되었던 뉴질랜드에 관한 여러 가지 이야기를 계속 이어갔다.
현재 수상이 여자인 뉴질랜드는 노인연금이 잘 되어 있어 노인들이 살기에도 좋지만 여자들이 살기 좋은 나라이다. 북섬과 남섬으로 나누어져 있고 수도는 웰링톤, 영어와 마오리어를 공용어로 사용하지만 대부분 사람들은 영어를 사용하고 있다. 경제의 중심지며 상공업도시로 알려진 오클랜드는 요트 도시로 불릴 만큼 요트 보유량이 높다는 것까지 여행을 떠나오기 전 기본적인 상식은 알고 와야겠다는 생각에 미리 공부하고 온 내용까지 막힘 없이 술술 이어갔다. 일행들을 향해 궁금한 점이 있으면 질문하라는 말에 여기저기서 질문이 쏟아져 나왔다. 나이는 몇 살인지, 결혼은 했는지, 가이드말고 또 다른 직업은 있는지, 이민은 언제 왔는지 등등... 그러다 어느 순간 이야기의 방향은 신용을 중요시하는 나라 뉴질랜드에 살면서 겪은 경험담으로 바뀌었다. "성공하려면 몸이 힘든 일부터 해야하며 자존심을 버리면 그 무엇이라도 할 수 있고 열심히 하면 신용이 쌓여서 일거리도 생기기 마련이니 결국 무엇을 하든 마음이 중요하지 어디에 사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사느냐가 중요하다"는 말로 자신의 경험담을 끝내는 가이드에게서 그 순간만큼은 전날 밤 처음 얼굴을 대면한 사람이라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을 만큼 신뢰라는 단어를 떠올렸다. 더불어 옆자리에 앉은 딸아이가 긍정적인 생각을 지닌 가이드의 말을 듣고 느끼는 게 있었으면 좋겠다는 바램도 가져보았다.
영어권은 말이 차가워 싫다는 가이드는 같은 영어권인 미국이나 캐나다 사람들이 미안하다는 말을 즐겨 쓰는 것과 달리 뉴질랜드 사람들은 책임소재와 이해타산 때문에 미안해 라는 말을 함부로 하지 않고 실례합니다 라는 말을 많이 사용한다며 여행지에서 혹 발생할지도 모르는 일에 맞닥트리면 미안하다는 말 대신 실례합니다 라는 말을 사용하라고 일러주었다. 이야기에 흠뻑 젖어있는 동안에도 틈틈이 창 밖을 내다보았는데 천혜의 자연과 다양한 문화가 있는 아름다운 섬나라 뉴질랜드는 목축업이 근간산업이라는 말이 실감날 정도로 드넓은 풀밭에 반야생인 양과 젖소들이 한가로이 풀을 뜯고 있었고 건초나 옥수수를 베서 둘둘 말아놓았다가 가축들의 먹이로 사용한다는 건초더미도 군데군데 눈에 띄어 내 자신이 머나먼 이국 땅에 온 사실이 새삼스레 생각났다.
아그로돔 농장 안에는 약 350년 전에 멸종된 어마어마한 크기의 ‘모아’ 새 동상이 있었는데 어찌나 크던지 정말 새 맞아? 하는 의문이 들었다. 지금도 화석이 발견된다는 이야기에 놀라며 목축업이 발달한 뉴질랜드의 관광산업 중 하나인 아그로돔 양털 깎기 및 양 쇼를 관람하기 위해 8각형의 목조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동시통역이 되는 이어폰이 고장난 것도 많고 볼륨을 최대한 높여도 들리는 소리가 너무 작아 여기저기서 불평들이 쏟아져 나왔지만 막상 뉴질랜드에서 키우고 있는 약 스무 종류의 양들 중 덩치 큰 메리노를 시작으로 진행자의 호명에 따라 자신의 이름이 적힌 자리를 양들이 찾아가자 일제히 박수가 터졌고 뒤이어 등장한 두 마리의 사냥개가 빠른 속도로 양의 등을 차례로 밟고 몇 바퀴 돌자 쇼는 절정에 달했다. 관광객들의 박수소리가 잠잠해지자 양털 깎기 챔피언의 시범이 선보였는데 불과 3분의 시간도 걸리지 않아 털이 보송보송하던 양은 누드 양이 되어 버렸다. 그 모습을 보니 양털은 보통 1년에 2번 깎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것과 상관없이 털 깎인 양이 왠지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깍은 털은 장내로 던지고 털 깎인 양은 경매에 부쳤는데 재미로 한 즉석 경매라 그런지 단돈 몇 달러에 경매가 되었다. 객석으로 던져진 양의 털은 서로 돌려가면서 만져보았는데 털에서 나오는 ‘라놀린’이라는 기름성분 때문에 손가락이 금새 부드러워졌다. 할 수 있는 기회가 있다면 여행지에서의 특별한 경험을 하고 싶었던 나는 새끼 양에게 젖을 먹이는 경험과 소 젖 짜는 경험을 할 사람은 손을 들라는 신호가 무섭게 오른손을 높이 들었지만 아쉽게도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다.
밖에서 하는 양몰이는 울 밖에 빙 둘러 서 있는 사람들이 민망해할 만큼 단순했다. 모두들 에그 벌써 끝이야 하는 표정을 하고 트랙터를 타고 아그로돔 팜투어에 나섰다. 우리일행을 안내할 사람은 마우리어로 돼지라는 이름의 ‘쿠니쿠니’라는 애칭을 가진 한국인여성이었는데 아줌마특유의 푸근함이 느껴져 바라보기가 한결 편안했다. 마음씨 좋게 생긴 그녀의 안내에 따라 사슴, 소, 양, 타조, 알파카 등 동물 구경과 먹이주기를 할 수 있었는데 습관에 의해 길들여진 동물들은 사람을 무서워하기는커녕 오히려 사람들이 동물들의 배설물들을 밟을까 염려하며 피하는 풍경이 우습기 그지없었다. 농장주위에는 번지 점프대와 몇 가지 놀이시설들을 갖추고 있었지만 어느 누구도 그런 것들에 관심을 보이는 사람도 없었고 실제 가까이에서 구경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만큼 멋있어 보이지도 않았다. 동물구경과 먹이 주는 것이 끝나자 키위농장으로 이동했는데 모두들 처음 보는 이색적인 풍경을 담느라 바쁘게 움직였다. 그에 질세라 우리 모녀도 수컷나무 주위로 많은 암컷나무를 거느린 일부다처제 형태의 키위나무 사이를 요리조리 나풀거리며 사진 찍기에 좋은 장소를 찾아다니느라 한 자리에 가만히 서있는 여유를 갖지 못했다. 키위로 빚은 와인과 그곳 농장에서 얻은 꿀맛을 맛볼 수 있는 시간을 가졌는데 처음 마셔본 키위와인은 의외로 빛깔, 향기, 맛에서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뉴질랜드 꿀이 유명하다는 이야기와 달리 막대에 찍어 맛을 본 꿀은 달지 않아 얼마든지 먹을 수 있겠다는 생각만 들뿐 몇 숟가락 먹으면 속에서 불이 나는 것 같이 강한 느낌을 받는 우리나라 토종에 비할 바가 못되었다.
아그로돔 팜 투어를 마치고 폴리네시안 유황 온천욕을 했는데 들어서는 입구부터 유황냄새가 코를 찔렀다. 하루에도 몇 번씩 치솟는 간헐천과 지열로 끓고 있는 땅 로토루아는 15만년전부터 용암이 들끓던 화산지대로 약 100년 전에도 화산이 폭발한 적이 있으며 온천, 간헐천, 호수가 많은 관광, 휴양도시다. 남녀 구별 없이 들어가는 노천탕에 수영복을 입은 채 앉아있는데 딸아이가 어려 보였는지 나이를 물었다. 올해 15세라 어린이 전용 풀로 가지 않아도 된다는 말을 했지만 믿어지지 않는지 그곳 책임자는 고개를 갸우뚱거리면서 나에게는 34살쯤 되어 보인다는 말을 덧 부쳤다. 옆에서 가만히 듣고 있던 딸아이는 엄마는 나이보다 젊게 봐서 좋겠다며 얼굴 가득 생글거리는 내게 그만 좋아하라는 표정을 지었다. 갈매기가 노니는 노천탕에서 몸을 담그고 있는 느낌이란 안 해 본 사람은 그 느낌을 이해하지 못할 정도로 몸은 개운하고 마음은 상쾌했다. 온천욕을 끝내기 위해서 샤워장으로 들어서는데 귀에 익은 우리말이 시끄럽게 들려왔다. 가만히 들어보니 한 무리의 일행 중 비누나 샴푸 등을 챙겨온 사람이 없어 어떻게 해야할지를 몰라 난감해하고 있었다. 먼 이국 땅에서 못 본 체 할 수도 없어 내가 가지고 간 비누를 내어주고 그들이 다 씻을 때까지 기다렸지만 온천에 오면서 비누, 샴푸, 타월, 약간의 화장품 등을 준비해야한다는 사실을 미처 생각해내지 못한 사람들이나 준비하라고 일러주지 못한 프로정신이 결여된 그들의 가이드를 생각하면 안타깝다 못해 은근히 걱정이 되었다. 비싼 돈 내고 먼 곳까지 와서 즐거운 여행을 하지 못하면 어쩌나하는 생각에......
온천욕을 하고 나니 다들 얼굴이 보송보송해진 느낌이었다. 온 몸의 피로가 말끔히 가신 기분을 느끼며 PARK HERITAGE HOTEL ROTORUA 호텔에 체크인을 하고 마오리 민속춤관람 및 항이디너(마오리족의 전통 음식, 지열을 이용한 음식)를 즐기기 위해 짐 정리도 뒤로 미룬 채 쇼를 하는 극장으로 갔다. 뉴질질랜드의 원주민인 마오리족은 옛날엔 식인종이였다는데 혓바닥을 내밀고 눈을 부라리며 "깜바떼 깜바떼"하는 하카 춤은 보는 내내 즐거움을 선사했다. 음식을 먹으면서 마오리족의 역사, 전쟁, 사랑 등을 춤과 노래로 보여준 공연을 감상하는 재미도 좋았지만 연가로 알려진 뉴질랜드민요 ‘Pokarekare ana’의 노랫말과 곡을 미리 복사해서 준 가이드 덕분에 태어나 처음으로 마오리어로 된 노래를 부를 수 있었던 점과 그들의 전통 춤을 직접 배울 수 있었던 기회는 뉴질랜드 여행에서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추억거리가 되었다.
극장에서 식사를 한 후 아이들은 호텔에 남겨 두고 어른들만 근처 한국인 식당으로 갔다. 골뱅이무침이 특히 맛있다는 식당에 마주 앉은 사람들은 나이, 사는 곳, 하고 있는 일 등 지극히 기본적인 이야기를 시작으로 소주잔이 오고가는 횟수가 늘어나자 삶과 사랑, 결혼에 대한 폭넓은 이야기까지 끝도 없이 이어졌다. 식당 문을 닫아야한다는 말에 한참 재미를 더하던 이야기를 멈추고 일어선 때문인지 누군가 노래방 가자는 제의를 했지만 기다리는 아이들 때문에 노래방은 다음날로 미루고 그 날 일정을 마쳤다. 술을 마시면 혈액순환이 잘돼 잠이 잘 온다는 다른 사람들 말과 달리 평소 안 하던 행동인 소주 석 잔을 마셔서인지 쉬 잠이 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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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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