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 16년 차로 살고 있는 지금까지 나와 남편사이에 의견이 좀체 하나로 통일되지 않는 게 있다면 여자와 남자 사이에 친구가 될 수 있다는 나와 절대로 친구로 남을 수 없다는 남편의 생각이다. 동갑내기 부부인 우리는 이 문제만 나오면 각자의 생각을 상대방에게 이해시키기 위해 애써보지만 언제나 변하지 않는 상대의 생각만 확인할 뿐 양보란 없다. 남자와 여자를 바라볼 때, 구분하기보다 동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사람으로 보는 나에 비해 남자와 여자를 확실하게 구분하는 남편의 생각은 도저히 해결점을 찾을 수 없는 하늘과 땅 차이를 능가하는 다름이 있다. 평소에는 이 문제에 대해 잊고 살기에 별다른 생각이 없다가도 우연히 다른 친구를 통해 어린 시절 함께 놀았던 고향친구나 초등학교 동창들 소식을 들을 때면 다들 그동안 어떻게 변했는지 여자와 남자 구분 없이 친구들을 한번쯤은 보고도 싶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 생각이 드는 순간이면 남녀간의 문제에 관한 한 너무도 보수적이어서 때로는 답답하다는 생각마저 드는 남편의 고집을 딱 한번이라도 좋으니 꺾어보고 싶다는 생각도 든다. 하지만 좋은 게 좋다고 결혼생활동안 남편이 싫어하는 행동은 하지 않으려 노력해왔기에 초등학교 시절, 부회장에 우등생에 소위 잘 나가는 나였지만 결혼 후 초등학교 동창회뿐만 아니라 어린 시절 함께 뛰어 놀았던 고향친구 모임에도 가 본 적이 없다.
여자와 남자는 절대로 친구가 될 수 없으니 동창회에 나가지 말아 달라고 부탁하는 남편의 생각에는 매스컴의 영향도 한 몫 했음을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시절이 하수상하니 신혼이혼에 황혼이혼에 절반의 실패를 경험한 사람들이 나날이 늘고 있는 가운데 드라마에서까지 동창 몇 명만 만나도 첫사랑이 어쩌니 하면서 잊고 있었던 감정을 새롭게 떠올리게 하는 설렘 그 이상의 묘한 상황으로 몰고 가 비록 드라마 속이지만 가정해체위기까지 치닫는 형편이고 보면 수 년 전 평소 연락을 주고받던 여자친구를 통해 우리 집 전화번호를 알게 된 초등학교 남자동창이 전화를 받은 남편에게 자신이 누구인지 밝히지 않고 무작정 희숙이 좀 바꿔달라는 기본을 무시한 행동은 그 후로 여자와 남자는 절대 친구가 될 수 없다는 남편의 평소 생각을 확고하게 굳히는 계기가 되었다. 남편 말대로 전화를 건 이유와 자신을 알릴 수 있는 간략한 인사 정도만 있었어도 동창회에 나오라는 연락을 대표로 한 초등학교 동창생 남자에 대한 생각과 남녀가 함께 만나는 동창회자체에 대한 생각이 부정적이지만은 않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은 남아있다.
어제 오전, 내가 수영장에 있는 동안 내 휴대전화로 수 차례 전화를 했지만 받지를 않자 급기야 전화 받으라는 문자 메시지까지 보낸 초등학교 여자 동창을 통해 전해들은 이번 주 토요일 모임에 대해 가야 할지 말아야 할지를 놓고 지금 나는 고민에 빠졌다. 초등학교 시절 특별히 뛰어난 구석이라곤 없었던 평범한 아이로만 기억되는 남자 동창이 K대학교 전자공학과 교수로 재직중인데 작년엔 대통령상을 받아 어마어마한 거액을 타더니 이번에도 일천 만원의 상금을 받았다며 친구들에게 한 턱 쏜다는 소식은 친구도 모르고 멋도 부릴 줄 모르던 대학시절 그 친구의 모습만 기억하는 나로서는 멋진 사회인으로 성장한 것 이상으로 어린 시절 친구들을 찾고 여유를 즐길 줄 안다는 사실이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지금 나는 많은 사람들이 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사항에 대해 고민한다. 아직 미정인 주말 가족여행이 혹여 취소되어 시간적인 여유가 생긴다면 모임에 가겠노라 덜컥 약속부터 한 것에 대해... 갈 기회가 생긴다면 남편에게 이야기해야 옳은지 하지 말아야 좋을 지에 대해서도... 이 글을 읽는 이들 중에는 고민 아닌 고민을 한다고 웃을지도 모르겠지만 내게 있어 이 문제는 그리 단순하게 이야기 될 성질의 것은 아니다. 아내인 내가 원하는 일이라면 물심양면으로 지원을 아끼지 않는 남편이지만 유독 경계를 하는 부분이 남녀가 함께 만나는 동창회에 나가는 문제이고 보면 조심스러운 게 사실이다.
취미가 다양해지고 다양해진 취미활동을 쉽게 접할 수 있는 장소가 주변에 널리 퍼지고 있는 가운데 세대를 넘은 인터넷 인구의 증가는 이성간의 만남을 더 한층 쉽게 연결해주는 상황이 되었다. 부쩍 늘어난 동아리, 동호회, 동문회 등 어떤 형태로든 현대사회를 살면서 이성간의 만남은 점점 늘어만 가고 있는 게 현실이다. 결혼한 사람들 중 비록 소수에 속하는 사람들의 이야기일지라도 그 속에서 아는 사람 이상의, 친구 이상의 감정이 싹틀 수도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 옳고 그른지에 대한 판단은 접어두고라도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다.
안정된 가정 속에서 남편의 사랑을 확인하며 사는 나도 가끔은 동성친구보다 이성친구가 필요할 때도 있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이런 생각은 비단 나만의 생각은 아닐 것이다. 아무튼 이성끼리는 동성이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까지도 수용할 수 있다는 생각, 더러 하곤 한다. 그렇다해도 나라는 사람이 여자이기에 앞서 사람이기를 고집하는 이유로 사람을 대할 때 굳이 여자, 남자라는 구분을 앞세우지는 않는다. 동시대를 살면서 말이 통하고 생각을 공유 할 수만 있다면 누구나 친구가 될 수 있다는 생각, 그 생각이 어쩌면 보수적인 남편을 더 자극하는 일일 수도 있겠으나 상대방을 존중할 줄 알고 어떤 이야기를 들려주어도 말이 날까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사람이면 그 사람의 학벌이나 생활환경, 직업 등은 친구를 선정하는데 그리 중요한 기준은 되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편이나 다른 이들에게 여전히 여자로 비춰질 수 있는 지금의 나이가 나는 즐겁다. 나이가 들어 남편의 시각이 변하지 않는 한, 내게 있어 여자와 남자는 정말로 친구가 될 수 없는가 하는 문제는 앞으로 풀어야 할 숙제로 남아있지만 말이다.
2006년 12월 - 喜也 李姬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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