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갑내기 남편은 분위기 좋은 곳에서 단둘이 근사한 식사를 하거나 멋진 장소에 가서 손잡고 느긋한 데이트를 즐길 때 아내인 내게 하는 말이 있습니다.
"누가 보면 우린 불륜이야, 아, 저기 저 사람들도 틀림없는 불륜이네. 생각해 봐. 누가 이 시간 이런 곳에 부부가 함께 온다고 생각하겠어......"
비슷한 상황에서 매번 같은 말을 하는 건 아니지만 일 년에 몇 차례 잊을 만하다 싶으면 비슷한 말을 하는 남편이 우습기는커녕 어느 때는 내 자신이 오히려 남편이 하려고 하는 말을 가로채
"자기는 좋겠네. 남들 눈에 내가 애인으로 보여서......”
요 며칠 무리를 했던지 생전 아파본 기억이 없던 무릎이 시큰거리고 열이 나서 오늘쯤은 미루지 않고 병원에 가야지 생각하고 있었는데 친절한 남편은 내가 혹여 바쁘다는 핑계로 병원에 가지 않을까 싶어 수영장에서 나올 시간에 맞춰 잊지 않고 전화를 해 병원으로 바로 갈 건지 영어회화 공부하러 갈 건지를 묻습니다. 의료보험증을 가지고 오지 않았다는 대답에 남편은 몇 분 더 있다 수영장에서 나오라 이르고는 집에 들러 의료보험증을 챙겨 약속장소인 수영장 근처로 왔습니다. 그렇게 만난 남편은 병원은 수업마치고 나중에 가고 점심 먹고 공부하러 가라고 했습니다.
결혼 17년 차로 살고 있는 동안 신혼시절을 포함한 2년여의 직장 생활을 제외한 나머지 기간을 사업가로 변신한 남편은 직장생활을 하는 사람들보다 필요한 시간 만들기가 자유로운 편입니다. 딱히 그런 이유 때문만은 아니지만 사업을 한 이후로 지금까지 손님을 접대해야 하거나 접대를 받아야 할 때를 제외하고는 집에서 나와 함께 하는, 대화가 있는 점심 풍경을 좋아합니다. 그런 남편을 위해서 가능하면 약속도 점심시간을 피해서 할 만큼 신경을 쓰곤 했던 나였지만 한동안 쉬었던 영어회화공부를 올 3월 초 다시 시작하면서 수업이 있는 화요일과 목요일은 수영장에서 나오기 바쁘게 수업이 있는 다음 장소로 이동을 해야 하기에 남편과 눈 마주 보며 오순도순 나누는 점심식사는 먼 나라 이야기가 되었습니다.
아는 이들 중 몇 몇은 더운 여름 날씨에도 하루에 세 번 따스한 식사를 준비하는 내게 귀찮지도 않느냐면서 남편더러 점심식사만큼은 밖에서 해결하라고 하지만 어쩌다 남편이 출장을 가거나 거래처 손님과 식사약속이 있어 혼자 먹어야겠다는 전화가 오면 시간적인 여유가 있어 편하다싶기도 하지만 대화가 없는 식탁에 앉아 혼자 먹는 점심이란 정말이지 자주할 일은 아니다 싶습니다. 그런데도 남편이 밖에서 점심식사를 해결했으면 좋겠다 싶은 생각이 들 때도 있습니다. 한 달에 한두 번 친구를 만나고 싶거나 왕성한 지적 호기심을 충족시킬 시간적인 여유가 필요하다 싶을 때 어쩌다 하는 생각이지만 말입니다.
점심을 먹기 위해서 모 식당으로 갔습니다. 언젠가 가족이 함께 와서 그 비싸다는 꽃등심을 먹었던 곳이기도 합니다. 점심시간이라 그런지 차들도 즐비합니다. 12시 30분이 채 되지 않은 그 시간, 평소 같으면 1층과 2층을 다 메울 만큼 많은 사람들이 올 리 없지만 식당이름을 바꾼다는 명목아래 갈비탕을 3000원에 선보인 이유가 그날 그토록 많은 사람들을 그곳으로 걸음하게 했습니다. 자리에 앉은 우리는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갈비탕을 주문했습니다. 남편과 함께여서인지, 음식 맛이 좋아서인지, 식당 환경이 멋져서인지 갈비탕 맛은 좋았습니다. 결혼 17년 차로 사는 동안 남편과 단둘이 데이트를 하면서 이렇게 값싼 음식은 먹어본 기억이 없습니다. 그 때문인지 남편은 여느 날과 달리
"오늘, 우린 불륜이 아니야. 진짜 불륜관계인 사람들은 이렇게 싼 음식은 먹지 않아." 라고 말했습니다.
"무슨 소리야. 오늘 당신이 지불한 불륜 값은 탁월한 선택이었어. 어디 가서 이 좋은 풍경에 식사도 해결하고 커피도 마시고 하겠어. 좋은 사람과 함께라면 무엇을 먹든 뭐가 그리 중요해. 아, 좋다. 잔디며, 나무며, 물고기며... 남들 눈에 우리가 불륜으로 보여서 더 좋다......"
우린 그렇게 가끔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우리들만의 아름다운 불륜과 동거중입니다.
2007년 06월 - 喜也 李姬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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