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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고 낮은 읊조림

읊조림(마흔) - 이희숙

by 시인촌 2004. 11. 26.

병원에서 집으로 걸어오는 동안 바람이 불었어.
수영장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동안에도 간간이 불었고
바람 부는 거리를 걸으면서 오늘도 습관처럼 거울을 봤어.
지나치는 거리의 상점 유리창을 통해 비춰진 내 모습 봐 줄만 했어.
밝은 갈색에 긴 머리, 짧은 가죽치마에 가죽잠바 
그리고 살짝 드리운 듯 걸친 스카프...
어쩌면 그 순간 내 자신이 여전히 젊고 예쁘다는 생각을 했을지도 모르겠어.
그래. 아마 그랬을 거야.
아니, 분명 그랬던 것 같아.
그 순간 내 자신이 예쁘다는 생각을 한 건 순전히 바람 때문이었는지도 몰라.
그게 아니라면 내 얼굴 여기저기 흩날리는 머리카락이
오늘 의상과 잘 어울려 묘한 분위기를 연출한다는 
친구의 말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고...
자신보고 예쁘다고 말하는 나를 지나치는 그 누군가 착각하지 말라고 비웃어도 
이 순간만큼은 기분 나쁘다거나 머쓱해하지 않을래.
이런 느낌이 드는 내 기분 뻔뻔해서도 아니고 철이 없어서도 아니야.  
그 만큼 내 자신이 소중하다는 걸 
요 며칠 더 깊이 느끼고 있는 중이라면 설명이 될까......

이 저녁 문득 그립다.
사랑했음으로... 
사랑하고 있음으로...
그리워했으므로... 
그리워하고 있음으로...
살아가는 일이 이토록 아름다운일임을 느끼게 해준 
지난 시간 속에 멈춘 기억들과 
오늘의 나를 지탱하는 사랑스런 풍경과
보고픈 사람들의 목소리와 얼굴, 걸음걸이, 눈빛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