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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고 낮은 읊조림

깊고 낮은 읊조림(일백 스물여섯) - 이희숙

by 시인촌 2010. 10. 16.

아침 식사 후 습관처럼 마시던 커피는

위와 빈혈 때문에 가급적 피하려 애쓴 지도 벌써 여러 달이 되었다.

오늘처럼 날씨가 좋은 주말이면 가을빛을 닮은 진한 커피향의 유혹을 뿌리치기가 힘들다.

커피포트에 물을 넣고 on 스위치를 누른다.

생각난 듯 MP3를 스피커에 연결시켜 볼륨을 높인다.

레코드판이나 CD에서 흘러나오는 느낌과 사뭇 다르지만

좋아하는 음악만 골라 들으니 즐겁다.

 

 

로봇에게 청소를 맡기고 외출준비를 서두른다.

요즘 들어 부쩍 무릎이 불편해 며칠째 물리치료를 받는 중이다.

우리 집 구조가 실내계단으로 된 4층이니 하루에 내가 걷는 계단 개수만도 족히 300은 넘는 것 같다.

남편과 나의 정성이 고스란히 스며든 집과 정원이 마음에 들어 평생 이사 갈 생각이 없으니

오르락내리락 걷는 계단 때문에 벌어지는 불편함은

이 집으로 이사 와서 누리는  행복에 대한 세금을 내는 심정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남편이 가족명함을 만들자며 샘플로 인쇄소에서 받아왔다는 명함 하나를 건 냈다.

가족사진과 식구들 전화번호와 집 주소까지...

친한 사람들에게만 나눠주면 정보유출에 대한 걱정은 없다며 생각을 해 보란다.

아이디어는 좋지만 고3인 딸이 대학을 입학하고 나면 생각해보자며 다음 기회로 미뤘다.

 

 

올해는 고3과 중3이 있으니 여행도 제대로 못했다며

내년은 여행가는 걸 첫 번째 순위로 정하자는 남편은

며칠 전, 가을 옷 몇 벌을 선물했다.

여느 때와 달리 내 옷만 샀다.

식구들 옷은 내가 알아서 구입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골라주는 옷을 입어보고 결정해서 사는 기분, 감동이다.

 

 

결혼 20년차로 사는 동안 그는 감동을 주는 쪽이고 나는 감동을 받는데 익숙하다.

나도 감동을 주는 편에 설 때도 있지만

가족이, 남편이 내게 주는 행복감과 만족감과 평화로움은

말로서 설명 할 수도, 표현 할 수도 없다.

그 설명 할 수도, 표현 할 수도 없는 고마움으로

오늘도 나는 가족과 나를 위해 밥을 짓고 행복을 엮고 미래를 준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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