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아들...
오늘 하루도 수고 많았어
지금은 모든 사물이 고요해지는 깊은 밤이야
이 생각 저 생각에 잠 못 들고 뒤척이다가
오랜만에 너에게 편지를 써
어린 시절 수학영재였던 네가
고등학교 때부터 기대에 못 미쳐
목까지 차오른 말을 누르고 아무렇지 않은 듯
위로와 응원의 말로 그날의 너의 기분을 살폈지
성적이 인생의 전부는 아니지만
잘하면 선택할 기회는 더 많다고 생각했던 엄마는
언제 터질지 모르는 활화산 같은 너를 보며
오랫동안 살얼음판을 걷는 기분이었어
대학에 진학한 후에도 너의 방황은 봉합되지 않아
가끔 불편한 마음을 드러낼 때마다
엄마의 욕심이 널 힘들게 한 것 같아 마음 아팠어
이런 내게 엄마 친구는
평생 효도할 것 어릴 때 이미 다 했다며
뭘 더 바라냐고 위로와 조언을 해 주었지
그때 너로 인해 얼마나 많은 행복을 느끼며 살았는지를
새삼 다시 생각나게 했어
두 살 때 네가 사용한 컵이랑 숟가락을
까치발을 세워 싱크대에 쏙 던져 넣을 때도
세 살 때 청소하는 엄마를 따라
빗자루 들고 흉내 낼 때도
다섯 살 때 누나 따라 무용복 입고 춤을 출 때도
어느 것 하나 사랑스럽지 않은 일은 없었어
가끔 넌 군대 이야기를 할 때
얼굴에 웃음이 묻어나는 걸 숨길 수 없더라
군시절이 정말 행복했다는 너
고향도 성격도 취미도 제각각인 사람들 속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도 더 넓어졌고
분대장 하면서 책임감과 배려심도 더 커져
널 보면 남자는 군대 가야 한다는 말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
세월이 흘러 어엿한 사회인이 된 지금
너는 일하는 게 즐겁고 행복하다고 말하지
그래도 힘들고 지칠 땐 네가 행복하기만을 바라는
널 사랑하는 가족이 있음을 기억해 줘
네 인생을 야무지게 살아가는 너를 보면
흐뭇하고 고마워 너만 행복하면 됐지 싶다 가도
아직 오지 않은 미래와 네가 달려갈 미래가 궁금해져
엄마는 아직도 너의 배냇저고리를 일 년에 두 번
기도하는 마음으로 빨아서 삶고 햇볕 샤워를 해
그러면 왠지 네 인생도 보송보송 따뜻해질 것 같아서
너의 앞날에 건강과 행복이 함께 하기를 바라며
2024년 8월에 엄마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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