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범씨,
늦은 시간 말갛게 씻은 탓인지 잠이 오지 않아 팔베개 해 준 당신의 팔을 살며시 빼고
나 혼자 사색의 방이라 부르기 좋아하는 옆방으로 건너왔어.
열어둔 베란다 너머 바라다 보이는 가로등 불빛이
밤부터 내리는 가을비로 인해 덩달아 차가운 느낌이지만
나지막하게 들리는 비 소리는
어린 시절 선 잠에 칭얼대는 아이 달래기 위해서
흥얼거리는 엄마의 자장가소리처럼 마음 가득 포근하게 젖어들어
마치 내 자신이 아이가 된 기분이야.
오랜만에 듣는 빗소리라 그런지 참 좋다.
비교적 방음이 잘된 편이라 방문을 닫으면 내리는 빗소리가 잘 들리지 않아
베란다 창문을 열어 둔 것만으로는 흡족하지 않아 방문마저 열어놓고
간간이 고개 돌려 바깥풍경 바라다보며 이 글을 쓰고 있어.
그러고 보니 깊은 시간 컴퓨터 앞에 앉아 있은 적이 언제였더라 싶을 정도로
그동안 나 숨가쁘게 앞만 보고 달려왔어.
바쁜 만큼 욕심이 많았던 거라는 걸 인정해야겠지.
당신은 잠들고 나는 깨어있는 이 시간,
처음은 아니지만 이런 생각을 해봤어.
매일 당신에게 느닷없는 행복을 전해주는 사람이 나였으면 좋겠다고...
함께 바라보는 풍경 속에서...
나란히 내딛는 걸음걸이에서...
마주 바라보는 눈빛에서...
사소한 일상을 주고받는 그 순간에도
당신이 좋아하는 가장 자연스러운 모습으로
온기와 사랑을 전하는 사람이 바로 나였으면 싶다고...
언젠가 내가 말했지.
부부는 여자, 남자로만 이야기 할 수 없는 존재라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당신을 보면 가슴이 뛰는 내가 좋아.
당신으로 하여 아름다울 수 있는 생활들이 고맙고...
좋은 생각은 아름다운 말을 낳고 아름다운 말은 행동을 긍정적으로 변화시키듯
이 가을, 나는 그 무엇도 두렵지 않고 망설여지지도 않는 나를 느낄 수 있어 행복해.
그만큼 당신과 두 아이는 나를 아내로서 어머니로서 강하고 당당하게 만들었어.
미범씨,
부부라는 이름으로 만나 당신과 함께 한 세월이
말로 다 표현하지 못할 만큼 고맙고 행복한 나날들이었듯이
앞으로 함께 해야 할 세월 역시도 흘러간 시간처럼
여전히 감사할 수 있는 날들로 채워질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아.
우리 살아온 나날들만큼 앞으로도 그렇게 건강한 생각과 행동으로
우리 자신과 두 아이의 미래에 성실한 사람들이 되자.
깊은 밤, 나로 하여금 감사하는 마음과 사랑하는 마음을 지니게 해 준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나는 내 존재에 대해 축배를 들고 싶어.
나는 행복한 사람이고 정말 괜찮은 삶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이야 라고...
당신도 내 말에 동의해 줄 거지?
뭐?
진작에 동의했다고...
고마워.
내일 아침 눈뜨면 제일 먼저 당신엉덩이 톡톡 두드리면서 사랑한다고 말해야지.
아유, 졸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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