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산소 같은 시작을 꿈꾸며 천년의 고도인 경주에서 새해를 맞이했다. 대구에서 가깝다는 이유로 일년에 서너 차례 찾는 곳이지만 들를 때마다 계절이주는 색다른 멋에 흠뻑 취할 수 있어서 괜찮은 여행지로 꼽는 경주는 "동방에서 아침 햇볕이 가장 먼저 닿는 땅"을 의미하는 서라벌(경주의 옛 이름)이라는 이름대로 유물과 유적이 많은 설명이 필요 없는 도시다.
※ 토함(吐含) ※
동해 넓은 바다로부터 올라오는 바람과 습기를
안개와 구름으로 변화시켜
이를 토하고 머금는다하여 토함이라고 한다.
구름과 안개를 토하고 머금으니
동해의 물결은 한 손에 잡힐 듯
일망부제로 손짓을 하고
불국사와 서라벌은 조용하고
평화롭기 이를 데 없다.
토함이라는 이 글은 우리가족이 묵었던 코오롱호텔 후문으로 들어서는 길에 위치한 토함이라는 라이브카페에서 얻은 글인데 경주에 들를 때면 생각나는 곳 중 하나이기도 하다. 차와 식사가 되며 386세대들이 좋아하는 음악이 주로 흐르는 그곳은 황토와 야자수 껍질로 엮은 멋스러움이 이색적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우리나라 유명한 산들 이름으로 구분되는 월악산, 설악산, 백두산, 월출산, 가지산, 북한산, 팔공산 등의 이름이 인상적이다. 각방마다 토굴처럼 생긴 그곳에 들어서면 짚으로 만든 멍석과 구석 한 모퉁이에 전구로 분위기를 살린 자그마한 벽난로가 눈에 띄는데 멍석 위에 앉아 있노라면 점점 따스해져오는 느낌이 온돌방 아랫목 같아 음식을 먹은 후 몰려오는 나른함을 잠시나마 두발 뻗고 누워 달랜 후 일어서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하다. 오래된 책상 위에 놋그릇과 제기로 차린 깔끔한 음식을 마주하다보면 불빛아래 마주앉은 사람의 얼굴이 참으로 곱다는 생각마저 들게 하는, 그곳을 지나치는 연인들이 있으면 한번쯤 생음악이 흐르는 그곳에 들러 음식 맛도 보고 차도 마시고 가라고 귀뜸하고 싶은 곳이기도 하다.
¤ 영일만, 장기곶 등대 ¤
바람의 도시인 제주보다 더 거센 바람이 우리 가족을 맞이한 영일만, 거센 바람에 하얀 파도가 부서지듯 밀려오는 바다풍광에 그만 넋을 잃고 말았다. 멀리서 밀려드는 파도가 딸아이 말처럼 인어공주에 나오는 고래친구들이 소풍을 나온 것 같아 잠시 어린아이 같은 마음으로 돌아가 고래고래 소리도 질러보았지만 거센 바람에 땅을 딛고 있는 발이 한순간 허공을 날아 부서지는 파도 속으로 풍덩 빨려들지는 않을지 염려될 정도로 어느 순간에는 두렵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포항에서 장기곶을 돌아 구룡포에 이르는 영일만 해안도로는 몇 번을 달려도 늘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아름다운 드라이브코스길이라는 사실을 실감했지만 도착한 장기갑 등대 박물관이 휴관이어서 여간 실망스러운 게 아니었다. 여행의 행선지를 정한 후 검색한 인터넷 사이트에는 분명 휴관이라고 나오지 않았는데 시설 확충 공사로 2001년 상반기까지 휴관이라는 안내문을 보고 씁쓸한 마음 감출 수 없었지만 애써 여기까지 왔는데 하는 생각에 연오랑 세오녀상을 배경으로 사진도 찍고 바다에 서있는 큰 손 동상 앞에서도 연신 찰칵찰칵 사진기를 눌렀다. 바람이 너무 심한 탓인지 그곳을 찾은 수많은 사람들은 다들 오래 머물지 못하고 추운 몸을 이끌고 바삐 어디론가 떠났지만 우리 가족은 추위도 아랑곳 않고 여기저기 열심히 돌아다니며 보고, 읽고, 찍고 적극적인 자세로 오랫동안 머물렀다.
한반도에서 해가 가장 먼저 뜨는 장기곶, 육당 최남선의 조선십경 중 하나인 그곳은 거센 바람에 바다로 빨려 들어가는 쓰레기로 몸살을 앓고 있었다. 변산반도 1999. 12. 31일 마지막 일몰의 햇빛으로부터 채화, 새 천년 기념 꺼지지 않는 불꽃으로 남게 될 영일만 호미곶 일출불씨, 2001년 1. 1일 첫 일출 정기 모아 채화, 동해 독도와 일출 불씨, 날짜 변경선이 통과하는 남태평양 피지섬에서 채화한 지구의 불씨를 합화,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꽃으로 보관하고 있다는 작은 비석에 쓰인 글귀를 읽어 내리며 내 사랑의 불씨를 챙겼다. 내가 가진 온기와 사랑이 나를 둘러싼 주변으로 확대되기를 바라면서...
♤ 송라 보경사 ♤
경북 영일군 송라면 내연산의 빼어난 산세를 배경으로 선 보경사는 신라 성덕왕 때 일조대사가 세웠다고도 하고 진평왕 때 명지법사가 창건했다는 설도 전해지는 고찰이다. 절 이름의 유래를 보면 명지대사가 중국에서 불경과 8면보경을 가지고 와서 못에 묻고 지은 절이라 해서 보경사라고 하는데 보경사 주변은 무려 12개의 폭포가 어우러진 절경을 자랑하는데 바로 내연산 12폭포골, 또는 보경사계곡이라 불리는 곳이다. 우리 가족이 찾아간 그 날, 포항스틸러스 축구팀이 운동을 하러 나왔는데 거센 바람에도 아무렇지 않은 듯 운동선수답게 씩씩한 모습으로 보경사계곡을 따라 뛰는 모습이 보기 좋아 한참을 그들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보경사를 경내를 둘러보다 내 발길을 멈추게 한곳이 있었는데 그곳은 다름 아닌 ‘보경사 미술전시관’이었다.
나라는 여자는 여행 중 볼거리, 읽을거리를 먹을거리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하기에 여행 중 특별하다거나 마음에 들어오는 것이라면 책이든 액자든 가리지 않고 사는 걸 즐긴다. 그런 취향덕분에 몇 종류의 책과 서예글씨체 그리고 동양화 수십 점이 전시되어 있는 그곳을 사고 싶은 그림이 있는지 어디 보자 하는 마음으로 작품 하나하나를 살펴보았지만 아쉽게도 내 마음을 잡아끄는 작품은 없었다. 눈요기만 실컷 하고 빈손으로 나오려는데 아무것도 선택하지 못한 내 모습이 그랬는지 아무튼 짝꿍(남편)이 그곳을 들른 기념이라며 원성 스님의 풍경이라는 책을 선물로 사 주었다. 혼탁한 이 세상에 산사의 어린 왕자가 들려주는 맑은 샘물 같은 글과 그림이라는 그 책을 이리저리 펼쳐보다가 우연히 펼친 페이지에서 ‘어떤 그리움’과 마주쳤다. 순식간에 가슴에 알싸한 바람이 훅 하고 일었다. 일순간 걸음을 옮길 수가 없었다. 그 알싸한 바람은 마치 나를 잃어버린 것 같은 통증을 동반했다.
♥ 어떤 그리움 - 원성 ♥
'보고 싶다'
진실로 그렇게 마음 깊이
가슴 싸 하게 느껴 본 적이 있으신지요.
아마 없으시겠지요.
앞으로도 없으시겠지요.
하늘을 보고 허공을 보다가
누군가가 보고 싶어
그냥 굵은 눈물 방울이 땅바닥으로
뚝, 뚝 떨어져 본 적이 있으신지요.
없으시겠지요.
없으실 거예요.
언제까지나 없으시기를 바래요.
그건 너무나, 너무나......
※ 삼사해상테마랜드 ※
일상에서 벗어나고 싶을 때 우리는 문득 바다를 떠올리곤 한다. '영덕' 하면 ‘대게, 그대 그리고 나'의 촬영장소, ‘삼사해상공원’ 등 떠오르는 게 많다. 삼사해상공원은 방갈로가 있고 바베큐장이 있어 여름에 오면 더 좋은 곳이지만 찾은 때가 겨울인지라 바람과 한바탕 전쟁을 치러야 했다. 통나무로 된 정통 유럽풍 레스토랑 ‘정일품송’에서 늦은 점심을 먹었는데 여름에는 많은 연인들과 관광객들로 붐비던 레스토랑이 겨울이라 그런지 우리 가족 외 한 테이블 밖에 없어 아쉽게도 라이브로 즐기는 섹스폰과 통키타 연주를 듣지 못했다. 그래도 좋았다. 비록 날씨는 추웠지만 누구하나 추운 날씨를 탓하는 사람 없이 경북대종이 있고 해맞이 광장이 있는 삼사해상공원에서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행복한 추억 만들기에 충실했으므로...
♧ 백암온천, 향암미술관 ♧
영덕을 벗어나 백암으로 오는 도중 아들 녀석은 자꾸만 우리만 밥 먹고 자동차는 배고프겠다며 걱정이 태산이다. 녀석의 성화에 못 이겨 기름이 반이나 남았음에도 불구하고 주유소에 가서 자동차 기름을 넣고 어둠이 내려앉은 산을 구비 돌아 백암한화콘도에 도착했다. 울진군 온정면에 있는 백암온천은 우리나라에서는 유일한 방사능천으로 유명하다. 수려한 산세와 시원한 동해를 끼고 있다는 지리적 이유 때문에 많은 이들이 찾지만 올해에는 우리나라 경제를 말해주듯 백암의 밤은 너무도 조용했다.
백암 한화콘도에서 조금만 나오면 인천대 예체능학장으로 계신 주수일 선생님의 향암미술관(鄕岩美術館)을 만날 수가 있다. 한지를 찢어서 붙이거나 불에 태워서 오래된 우리 것에 대한 담벽, 토담, 회상, 가마니 등의 모습들을 화폭에 담은 작품들과 오브제 형식으로 표현한 작품 그리고 국내 유명한 화가들의 작품과 40∼50대를 중심으로 국전에 3번 이상 특선 수상하신 분들의 작품과 30년 이상 모은 수석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계절 탓인지 미술관람을 하는 이는 우리 가족뿐이었다. 입장료 (성인 2000원, 어린이 1000원)에 비해 귀한 작품들을 많이 만날 수 있어서 좋았다. 조각공원에서 몇 컷의 사진을 찍고 내려오는데 떠나는 우리 가족을 향해 문밖까지 나와 깍듯이 인사를 하는 미술관 지킴이 아가씨의 모습이 오후의 햇살만큼이나 화사해 보였다.
◆ 경보화석박물관, 장사해수욕장 ◆
경보화석 박물관은 1996년 6월 26일 정식개관, 등록 84호 제 1종 화석 전문 박물관으로 한 개인인 강해중씨의 20년의 결실로 이루어진 사립박물관이다. 이곳 역시 관람료(성인 2000원, 어린이 1000원)가 있었다. 우리 집 두 꼬마는 화석전시회에 몇 번이나 가보았는데도 처음 보는 아이처럼 마냥 신기해하고 나를 닮은 딸아이는 기록하는 것마저 엄마인 나에게 뒤질세라 열심히 메모를 했다. 암모나이트류 화석과 모래의 장미 앞에서 나 역시 처음 보는 사람처럼 얘들아 이것 좀 봐 하면서 아이들의 호기심을 끊임없이 자극했다. 그곳을 빠져 나오면 MBC 인기 주말 드라마였던 "그대 그리고 나" 의 촬영장소인 어촌 마을과 장사해수욕장을 만날 수 있는데 장사해수욕장에는 강태공 두 명이 릴낚시 대를 드리우고 바다와 한 마음이 되어 있었다. 우리 가족을 제외한 여행객이라고는 한 쌍의 연인뿐, 어디를 둘러보아도 사람의 그림자는 보이지 않았다. 겨울 바다는 너무도 조용했다. 지난여름 통일 전망대까지 갔었지만 이번 겨울은 날씨도 춥고 짝꿍의 일 관계도 있고 해서 예정보다 이틀 빨리 여행을 마무리했다.
어둠이 짙은 도로를 달려 대구로 들어서니 화려한 불빛이 우리 가족을 반겼다. "역시 집이 최고야." 집안으로 들어서며 반가운 인사처럼 흥얼거린 짝꿍의 첫마디에 아이들도 나도 "맞아요." 하며 앞 다투듯 맞장구치며 집이 주는 안락함에 여행후의 피곤함도 잊고 오래도록 이야기꽃을 피웠다. 잠자리에 들기 전, 내 삶의 노트에는 이렇게 적었다. 여행은 떠나기 전의 설렘도 좋지만 제자리로 돌아온 후에 느끼는 마음도 떠날 때 마음 못지않은 설렘이 있다는 걸 알았다. 사람이든 물건이든 제자리에 있을 때 더 빛난다는 사실도......
2001년 01월 05일 -喜也 李姬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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