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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과 느낌

러브 오브 시베리아 - 이희숙

by 시인촌 2004. 2. 24.

♥ 러브 오브 시베리아(Sibirskij tsiryulnik :The Barber of Siberia) ♥

감독: 니키타 미할코프
주연: 줄리아 오먼드, 올렉 멘쉬코프, 리처드 해리스


비 내리는 월요일, 한 편의 영화를 보기 위해 가족들이 모두 집을 나선 뒤 서둘러 집안 정리를 끝내고 외출 준비를 했다. 원피스를 입고 집을 나서려는데 쏟아지는 빗줄기가 점점 더 굵어지고 있었다. 대문 밖에서 잠시 서성거리다 다시 집안으로 들어와 바지 끝단에 수가 놓인 연분홍 바지와 연분홍 티로 다시 갈아입고 집을 나섰다. 약속시각보다 조금 늦을 것 같다는 이야기는 했지만 도착해서 자리를 잡고 보니 영화는 이미 시작되고 있었다.  


한 여인이 웨스트포인트 사관학교에 있는 그녀의 아들에게 편지를 쓰고 있는 장면에서 난 직감적으로 이 영화는 한 여인의 삶과 사랑에 관한 이야기를 회상하며 거꾸로 거슬러 올라간다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시베리아를 배경으로 미국인 로비스트 제인이라는 여인과 어린 나이인 20세의 사관후보생도 안드레이 톨스토이와의 운명적인 사랑이야기.


오늘 난 영화의 줄거리를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물론 내가 이 글을 씀에 이 영화를 보지 못한 분들을 위해서는 최소한의 줄거리는 설명해야 할 것이다. 하여, 난 이해를 해야 하는 부분만 살짝 접근하려고 한다.


제인의 아들 즉, 웨스트포인트 사관학교에 있는 그녀의 아들은 침상 위 붙여둔 모차르트의 초상화 때문에 교관에게 곤욕을 치른다.  큰 소리로 모차르트를 모욕하지 않는 한 지독한 얼차려를 받아야 한다. 이 사실을 알지 못한 채 어머니는 편지를 계속 써내려 간다. 20년 전, 시베리아에서 시작되는 운명적인 만남으로부터.
모스크바행 기차에 몰래 숨어든 몇 명의 생도 중 아름다운 미국 여인 제인 곁에 혼자 남겨진 생도 안드레이 톨스토이는 첫눈에 그녀에게 끌리는 자신을 느끼고 제인 역시 순수한 안드레이의 모습에 묘한 느낌을 받는다.

제인은 발명가 더글라스 맥클라칸이 벌목기인 "시베리아의 이발사"를 정부에 납품하기 위해 맥클라칸의 딸로 위장하고 사관학교 교장인 레들로프 장군을 유혹하기 위해 사관학교를 찾아가던 중 그곳에서 안드레이를 다시 만나 서로의 눈빛에서 사랑을 확인한다. 하지만 운명은 그들 편이 아니었다. 제인을 좋아하는 레들로프 장군의 부탁으로 안드레이는 청혼의 연서를 레들로프 대신 읽어야 할 상황이 되었다. 제인을 사랑하면서도 장군의 부탁을 거절할 수가 없어서 어쩔 수 없이 그 연서를 읽던 안드레이는 돌연 자신의 사랑을 고백하고 또한 장군의 분노는 극에 달한다. 여기서부터 제인과 안드레이의 운명은 자신들의 바람과 상관없이 점점 더 멀어진다. 특히 이 사건 때문에 안드레이는 더 힘든 상황을 맞이하게 된다.


오페라 ‘피가로의 결혼’ 공연 중 제1막이 끝난 휴식 시간, 제인과 레드롤프장군의 이야기를 우연히 듣게 된 안드레이는 제인의 말에 충격을 받는다.
사랑한다면서 자신과 하룻밤 애틋한 몸 사랑을 한 여인이 장군에게 어린애에게 질투한다면서 장군과 안드레이는 비교할 수 없다는 식의 말로 안드레이를 절망하게 한다. 미친 듯 밖으로 뛰어가는 안드레이를 제인과 동료들이 뒤따라가고 제인은 일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며 이해해 달라는 말을 하지만 이미 안드레이는 제인의 고백을 듣지 못한 채 창문을 뛰어넘어 밖으로 나간다.

 
황제를 비롯한 많은 이들이 "피가로의 결혼" 공연을 기다리는 동안 비를 흠뻑 맞은 안드레이를 동료가 겨우 찾아와 데려오지만, 공연 중 머뭇거리는 톨스토이와 제인의 표정과 시간을 끌기 위해 계속 현을 켜는 바이올린의 활이 초점 이동으로 번갈아 보이는 장면은 폭풍전야처럼 긴장감이 감돌았다. 결국, 톨스토이는 그 활을 뺏어 들어 자신이 사랑하는 여인 옆에 있는 라들로프장군을 후려갈기기 시작하고 결과는 톨스토이가 국왕 시해 미수범으로 몰려 시베리아로 감금당하게 된다.


영화 중간 부분에 나오는 용서의 주간에 펼쳐지는 난장판 축제는 러시아인들의 사고를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으며 영화 속 인물들의 또 다른 모습도 즐길 수 있어서 참 좋았다. 19세기 말부터 10여 년간의 파란만장했던 러시아를 시간과 공간의 배경으로 삼고 있으면서도 이 영화는 사랑에 초점을 맞추었다. 평생을 안드레이한테 마음의 빚을 지고 있는 제인은 그의 환상으로부터 자유롭지를 못했다.
그녀는 안드레이를 만나기 위해 마음에도 없는 사람인 매클라칸과 결혼을 했다. 러시아에는 더이상 그녀 혼자 힘으로 갈 수 없는 상황인 출국금지 상태에서 매클라칸만이 그녀에게 있어서 러시아로 갈 수 있는 꿈이었기 때문이었다.

 
영화가 상영된 시간은 160분이었지만 결코 길다거나 지루하다고 느끼지 않았다. 드디어 그녀의 꿈은 현실로 이루어졌다. 다시 찾은 러시아, 그녀가 그를 찾아 시베리아 벌목장으로 가는 장면과 제인이 시베리아 벌목장 죄수들의 집단 거주지에서 물어서 찾아낸 안드레이 집 앞에서 안드레이 톨스토이라는 문패를 확인하고 얼굴 가득 환한 웃음을 짓지만, 그것도 잠시 그의 집안을 그의 이름을 부르며 샅샅이 살피던 제인은 안드레이의 집에서 그녀가 아닌 다른 이의 사람이 되어있다는 사실을 직감하고 그녀의 사랑이 너무 늦었다는 것을 깨닫고 쓸쓸히 마차를 타고 떠난다. 


제인의 회상에 이야기 초점이 맞추어져 있기 때문에 안드레이가 제인 그녀를 얼마나 기억하고 그리워했는지에 대한 설명은 미흡한 감이 없지 않았지만 이십 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마차를 타고 떠나는 그녀의 뒷모습을 멀리서 지켜보며 담배를 태워 물던 안드레이가 갑자기 불같은 열정으로 뛰어서 물을 건너는 모습은 말로는 다 표현할 수 없는 애절한 그리움과 이루지 못한 사랑에 대한 절절함이 베여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한편 안드레이와 제인의 단 하룻밤 몸 사랑으로 태어난 그들의 아들이 제인이 안드레이를 처음 만났던 그 당시의 나이가 되어 모차르트의 초상화 때문에 벌로서 방독면을 쓰고 있던 그 세월을 견디고 바람을 온몸으로 맞으며 방독면을 벗고 달리는 모습은 이 십 년 전 안드레이의 모습 그대로였다. 안드레이가 서 있는 광활한 나무숲과 그의 아들이 방독면을 벗어 던지며 달리는 들판이 러시아와 미국이라는 공간과 시간을 뛰어넘어 절묘한 조화를 이루었다.


영화는 많은 생각을 품게 했다.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사랑의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는 것과 19세기 말과 21세기를 뛰어넘는 시간과 공간 속에서도 이루지 못한 사랑에 대한 그리움의 빛깔은 인종과 국가, 성별, 나이와는 별 상관없이 비슷하다는 것을 느꼈다.
사랑은, 이루지 못한 사랑은 긴 긴 세월 동안 때때로 묻히고 잊힌다 해도 그 사랑의 인연의 끈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을.

영화를 보고 나오는데 비는 더 세게 내리고 있었다. 딸아이가 학교에서 돌아올 시간이라 차 한 잔도 마시지 못하고 혼자 나오는데 왜 그리 가슴이 아프던지 점점 더 거세어지는 빗줄기가 제인과 안드레이의 깊고 질긴 인연의 실타래 같아 집으로 돌아오는 동안 내내 가슴 한쪽이 시렸다. 영화는 끝났는데 내 마음은 비 오는 거리에서 바람처럼 서 있었다.



2001년 06월 19일 - 喜也 李姬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