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한번쯤은
지나간 것이 아름답다는 생각을 불현듯 할 때가 있다.
왜 그런 날 있지 않은가?
기별 없이 찾아든 기억의 무늬가 부담스럽지 않은 날
며칠 전 어느 한 순간이 그랬다.
어쩌면 그 순간 나는 마흔을 훌쩍 넘긴
지금의 편안한 내 나이를 기억해냈는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그 편안함으로 살면서 꼭 한번쯤은 안부를 묻고 싶은 어떤 이에게
무슨 말부터 해야 할지 호칭은 어떻게 불러야 할지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은 채
기억의 더듬이 속에서 찾아낸 번호로 무작정 전화를 걸었다.
신호가 가자 떨리기 시작했던 내 마음은
오래 전 전화번호의 주인이 같은 사람임을 확인하자
오히려 담담해지기 시작했다.
내 전화를 받은 상대는 나로 하여금 사람과 사람사이가
어떤 모습으로 남아야 하는지에 대한 생각을 오래도록 하게 한 사람이며
붓을 영영 놓고 싶다는 생각이 들만큼 내 글쓰기에 영향을 끼친 사람이다.
내가 한동안 소설에 미쳐 있을 즈음,
그 사람의 날카로운 몇 마디 말이 없었다면
나는 아마도 지금쯤 나에게 소설가라는 이름을 덤으로 주겠다는
몇 군데의 문예잡지 중 한곳을 골라 소설가 행세를 하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지만
지나고 보니 오래도록 나 자신으로 하여금 한 줄의 글도 쓸 수 없게 만든 상황들이
오히려 비 온 뒤의 땅이 더 굳어지는 것과 같이 단단한 나로 키웠지 않나 싶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006년 새해가 밝은지 며칠이 지난 지금도 나는 여전히
내 마음에 차오르는 글을 아직 한편도 쓰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그토록 쓰고 싶어 했던 소설도 오래 전 그 풍경에서 한 줄도 벗어나지 못했다.
그래도 나는 그 사람으로 인해 분명 내 자신을 냉정하게 읽어 내리는 훈련을 했고
사람과 사람사이를 바라보는 내 생각과 행동에도 변화를 주었다.
결과적으로 그 사람이 원하든 원치 안든 간에
어느 순간 그 사람은 내 인생의 엄한 스승이 되어 있었다.
나처럼 현실적이고 미래지향적인 사람한테 성장하게 하는 처방전을 준,
그 처방전으로 인해 나는 더 한층 성숙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으므로...
그런 측면에서 보면 누군가와의 어긋난 만남이나 누군가로부터 듣는 쓴 소리는
빨리 잊어야 하거나 기억하고 싶지 않은 아픔으로만 끝나는 것도 아닌 듯싶다.
생각지 못했던 내 전화를 받아 당황했을 법도 한 그 사람은
살아가는 풍경을 명랑한 목소리로 들려주었다.
특별히 오고간 말도 없었지만 그 순간 내가 명랑하다고 느낀 건
순전히 그 사람의 늙지 않는 유머감각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예전이나 지금이나 자신에게 게으르지 않는 삶을 살아가려고 노력중이라는 걸
몇 마디의 말에서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고...
나는 진정 그 사람이 행복했으면 좋겠고 건강했으면 좋겠다.
내가 더 이상 미안해하지 않아도 될 만큼...
문득, 생각하나가 스친다.
오만일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미안해야 할 이유 같은 건 애당초 없었는지도 모르겠다는......
2006년 1월 13일 금요일 비 내리는 날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