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전체 글622

아름다운 나이 - 희야 이희숙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세월의 흔적을 비켜 갈 수 없고주름진 얼굴과 깜빡이는 기억을 피할 수 없고어설픈 행동과 느려진 걸음걸이를 어쩌지 못하는 것 설레며 단장하는 날도 큰소리로 웃는 일도 줄어 어쩌다 벌써 이 나이가 되었나 싶어문득 허무한 생각마저 들지만살아온 경험치가 지층처럼 쌓여 마음 한편에 넓고 환한 방이 생겨나는 것 어른이 된다는 것은가시처럼 박혀 있던 욕심들을 내려놓을 줄 알고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과별일 없이 다 지나갈 거라는 믿음상처를 상처로 받아들이지 않을 여유가 생겨나는 것 지나온 길 되돌아보니 세상사 다 거기서 거기이해 못 할 것도 용서 못 할 일도 없어고로, 연꽃처럼 피고 닫히는 때를 잘 아는 지금이 좋다  2018년 - 喜也 李姬淑 2024. 8. 21.
언제나 새로운 청춘센터 - 희야 이희숙 눈에 익은 어린이집이 사라지고생소한 간판이 떡하니 걸렸다 둘은 고사하고 하나도 많다며 아이 낳기를 주저하는 요즘 세태소문 없이 사라지는 건 어쩌면 예견된 일 기억은 잃어도 사람 사는 곳은 매한가지가끔 큰 소리로 싸우기도 하고 마치 지금 일어나는 일처럼 말하기도 한다처음에는 남편 얘기인 줄 알았는데 듣다 보면 아들 이야기 요양원보다는 근사한 이름을 가진 청춘복지센터에는과거를 되새김질하는 사람들이 산다그들만이 사는 세상에서 말하는 사람도 듣는 사람도 처음인 듯 같은 말을 하고 또 하고 반복하지만마음은 언제나 청춘이다 온 생애를 다 바쳐 열심히 살았던 사람들그들에게도 고단했지만 눈부셨던 청춘이 있었다침대 하나가 자기 집 전부이며 사유 공간인 그곳에언제나 환한 봄이 다녀 간다 그곳에는 늙지 않는 청춘들만 있다 2024. 8. 21.
밀당 - 희야 이희숙 끝날 줄 모르는 줄다리기승부를 가늠할 수 없이 팽팽하다 방심하면 어김없이 탈이 났다시도 때도 없이 번갈아 가며 켜지는 빨강 신호등 자칫하다간 이방인에게 주도권을 뺏길까 조바심 난다허락도 없이 불쑥 다가온 너, 면역체계 이상 별일 없이 지나간 날은 사방이 봄날이었고무시로 흔들어대는 날은 온통 겨울이었다아, 기를 쓰며 달려드는 너더 기를 쓰며 달래는 나 몸 구석구석 한랭 전선이 형성되었다봄꽃을 시샘하는 꽃샘추위처럼창밖은 꽃샘바람과 봄꽃의 밀당이 한창인데나의 봄은 아득히 멀기만 하다  2024년 어느 봄날 - 喜也 李姬淑 2024. 8. 14.
독백 - 희야 이희숙 사진 제목 : 아름다운 동행 아름다운 나만의 언어를 갖고 싶다평생 함께여도 좋을 그런 사람 같은 밤새도록 콧대 높은 그는멀어지는 사람처럼 애만 태우고 불면 날아가기 십상인 나의 언어는움켜쥘수록 빠져나가는 모래처럼 힘없이 사라지고 잠들지 못한 밤시간의 징검다리를 건너온 자들은날 새는 줄 모르고 말의 유희를 즐기지만놓지 못한 어정쩡한 말들 사이에서나는, 차마 오도가도 못하고 그토록 갖고 싶던 나의 언어는햇살에 사라지는 눈과 같이잠시 흔적만 남길 뿐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마주할수록 멀어지고다가갈수록 낯설어지는나의 언어 그리고 혼잣말  2023년 04월 - 喜也 李姬淑 2024. 8. 12.
배용주 시인의 두 번째 시집 ‘여우다방’에 대한 리뷰(review) ‘여우다방’ 제목부터 눈길을 끈다.첫 잎, 두 잎, 세 잎, 네 잎, 끝잎으로 나눈 것도 돋보인다.읽기도 전에 궁금증과 호기심이 일어 시집에 대한 기대치를 높여 시(時)가 가진 즐거움과 상상력이 어떻게 구체화되고 어디까지 확대되는지 확인하고 싶게 만든다. 이 지점이 바로 제목만으로도 이미 절반의 성공을 거두었다고 말하고 싶어지는 이유다. 시인의 시선을 따라가다 보면 기억 속 아버지를 반추하는 시가 여럿 있는데 그중에서도 첫 잎 ‘의자’와 ‘그릇’이 가장 진솔하게 와닿는다. 첫 잎 ‘의자’ 중에서 “세상 모든 아버지는 거룩한 종교다” 세상 무게를 온몸으로 받아 낸 아버지의 노고가"가족을 푹신하게 앉히던 아버지의 걸음걸이를 나도 모르게 닮아가고 있었다”  ‘그릇’ 중에서 “아버지는 인정에 고픈 내게 그릇이 .. 2024. 8. 7.
아름다운 안부 - 희야 이희숙 지난밤 봄바람 편에 사나흘 더 기다려야 얼굴 볼 수 있다는 작약의 타전이 왔다 누군가에겐 사나흘이 십 년보다 더 긴 시간일지도 모른다 왈칵 마음 쏟아지는 소리에 아직 닿지 않은 그대가 불현듯 그립다 그립다는 생각에 꼬리처럼 이어지는 말, 거기 거기설명하지 않아도 도착지가 어디인지 분명한 말 거기불쑥 떠나고 싶을 때쓰윽 나타나는 출입문 같은 말 거기생각나지 않는 이름에 그리움을 포개는 말 거기돌고 돌아서 마침내 당도하는 종착역 같은 말  금낭화와 낮달맞이꽃이 약속처럼 속삭이는이토록 아름다운 봄날엔숨기고 싶은 비밀 하나쯤 두고 가도 좋을마음이 머무는 말 거기, 그대   2024년 05월 - 喜也 李姬淑 2024. 7. 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