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시가 있는 간이역

3월, 그 눈금 없는 계절

by 시인촌 2026. 2. 23.

동토(凍土)의 끝단에서 꽃은

()을 먼저 풀어놓는다

아직 추운데

채도를 높인 것들이

몰래 담을 넘는다

 

우리는 앞과 뒤를 세우는 일에 길들여졌다

먼저와 나중이라는 눈금을 그어 두어야

발밑의 흔들림을 견딜 수 있었으므로

 

순서대로 피어야 봄이라 믿는 동안

개나리와 벚꽃은 차례를 묻지 않고

한꺼번에 환해진다

 

피어남은 누구의 허락을 기다리는 일이 아니라

()의 무게가 서로에게 번지는 일

 

줄 세우던 손을 내려놓고

이름 붙이려던 혀를 접는다

 

조금 느려도

길을 헤매어도 괜찮은 것은

지금 여기

우리가 발 딛고 서 있는

이 머무름이 이미 도착이기 때문

 

3월은 질서가 무너진 달이 아니라

너와 나 사이의 그늘이 먼저 지워지는 달

이름을 부르지 않아도 웃음이 나고

우리 안의 봄이 차올라 서로에게 닿는 달

 

 

2026년 2월 - 喜也 이희숙

'시가 있는 간이역' 카테고리의 다른 글

25시를 사는 여자  (1) 2026.03.03
가장 가벼운 무게  (0) 2026.02.27
끝나지 않은 이야기  (0) 2026.02.10
몸빼바지 런웨이  (0) 2026.02.05
못내 그리워  (0) 2026.02.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