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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가 있는 간이역

가장 가벼운 무게

by 시인촌 2026. 2. 27.

대학병원 안 넓은 도로 한 귀퉁이

약국 앞 좁은 보도블록 위에 박스를 펴고

무릎으로 꾹꾹 눌러 차곡차곡 쌓는 할머니

그 옆을 지나치는 무수한 낮은 발자국 소리

 

수북이 쌓인 박스

내일 아침 쑤셔올 어깨와 무릎이 걱정돼도
오늘은 지폐 몇 장 더 받을 수 있을 거라는 기대에
할머니의 거친 손은 쉴 줄을 모른다

 

저녁 여섯 시, 약국 불빛이 하나둘 꺼지고

얼마의 돈을 받아 쥘 생각에

무거운 줄 모르고

리어카 끄는 발걸음을 재촉하는 할머니

그것이 할머니의 유일한 가벼운 짐일지 모른다

 

모든 것이 잠잠해진 밤

할머니의 하루도

부디 편안하기를.

 

 

시작 노트: 눈 내린 다음 날 오후, 가톨릭대학병원에 정기 진료가 있어서 갔는데 그날따라 환자가 많아서인지 주차장 들어가는 시간이 꽤 걸렸다. 결국 예약 시간에 도착하지 못한 탓에 35분 기다림 끝에 진료를 받고 병원 옆 귀퉁이에 있는 약국에 들렀다. 오후 5시를 훌쩍 넘긴 시간인데도 병원 안과 밖은 사람들의 낮은 발자국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약국 앞 보도블록 위에 박스를 펴고 무릎으로 꾹꾹 눌러 차곡차곡 쌓는 할머니를 봤는데 양이 꽤 많아 보였다. 순간 힘은 들어도 할머니 얼굴에 웃음꽃이 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과 저 무거운 걸 어떻게 가지고 갈까 싶어 걱정도 들었다. 집에 와서도 할머니의 모습이 마음에 남아 할머니의 하루도 부디 편안하기를 바랐다.

 

 

2026225- 喜也 이희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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