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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가 있는 간이역252

무제無題 - 이희숙 한낮엔 기별도 없더니 밤만 되면 보초를 서는지 신호를 보낸다 잠 설친 시간이 창백하다 표정없는 눈에 함박눈이 쌓인다 흐린 기억 저편에서 안부를 전한 모양이다 뜻밖의 안부에 가시처럼 돋아나던 아픔도 길을 잃었는지 소식이 없다 사라짐이 위대한 순간이다 2011년 1월 - 喜也 李姬淑 2011. 1. 13.
반어법에 대하여 - 이희숙 “연애 하지 마.” 이 무슨 도발적인 말인가? 강렬하다 못해 싱싱하고 사랑스럽기까지 하다 기다림이 얼마나 독하고 외로웠으면 반어법을 쓰는 걸까 천연기념물 그 남자는 악마의 속삭임처럼 혹은 영화 속 대사처럼 2011년 1월 - 喜也 李姬淑 2011. 1. 12.
커피에 관한 개똥철학 - 이희숙 커다란 머그컵에 마시는 커피는 여유다 여유를 즐기며 마시는 커피는 그리움을 부르고 그리움에 갇혀 마시는 커피는 고독을 앞세우고 고독을 삼키며 마시는 커피는 숨겨진 나를 만나는 기회를 선물한다 오고가는 눈빛 속에 마시는 커피는 설렘이다 설렘 안고 마시는 커피는 즐거움을 나누고 즐거움.. 2011. 1. 7.
삶 Ⅶ - 이희숙 침몰하는 폐선처럼 생의 한가운데서 허우적거릴지라도 소금기 없는 얼굴로 한때는 꽃이었을 생의 뒤꿈치를 그리워하지 말라 꽃같이 환한 얼굴로도 한 시절 노래였을 생의 심장을 함부로 더듬지 말라 더듬거리는 용서 앞에 세월의 귀를 자르고 시간의 걸음을 더디게 할 묘약이 준비되어 .. 2011. 1. 6.
나이 듦에 대하여 - 이희숙 눈 폭탄을 맞은 날씨 덕분에 택배로 보낸 김치와 반찬 몇 종류가 든 아이스박스를 하루 늦게 받은 서울 사는 시아버지는 낯선 물건을 경계하는 아이처럼 아이스 팩에 대해 몇 번이고 물으신다. 효자 아들은 “아버지, 파란색 젤리 같은 건 먹는 게 아니고 얼음 대신 넣은 거니까 버리지 마세요.” 알았다는 대답 대신 “말랑말랑한데 안에 있는 거 쏟아버릴까?” “녹아서 그러니까 음식물 다 꺼내고 그대로 넣어두세요.” 음식 보낼 때마다 한 자리 차지한 아이스 팩, 눈에 익었을 법도 한데 기억에 없으신 모양이다 통화가 끝나는가 싶었는데 캔이 아닌 포장에 든 스팸이 이상하다고 전화기를 잡고 늘어지는 시아버지와 같은 말을 테이프 되감기 하듯 대답하는 효자 아들 “우리 집에 오셨을 때 먹었던 스팸하고 아버지 서울로 가실 때.. 2011. 1. 1.
12월엔 - 이희숙 그리움이 얼마나 짙어 바다는 저토록 잉잉대는지 바람은 또 얼마나 깊어 온 몸으로 뒤척이는지 묻지 마라 차마 말하지 못하고 돌아선 이별처럼 사연들로 넘쳐나는 12월엔 죽도록 사랑하지 않아도 용서가 되고 어쩌다보니 사랑이더라는 낙서 같은 마음도 이해가 되는 12월엔 2010년 12월 - 喜也 李姬淑 2010. 12. 28.